중국,21세기 초강대국?!

측천무후는 어떻게 당고종의 황후가 될 수 있었는가?

朱雀 2011. 5. 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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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측천무후(則天武后)! 중국 역사상 그녀가 가장 많이 조명받는 이유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제이기 때문이다. 무측천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690년 황제로 오르면서 나라이름을 무주(武周)’라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임종시에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로 하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겐 측천무후라는 별칭으로 더욱 알려져 있다. 그녀가 대단한 것은 평민 출신으로 당 태종의 재인으로 들어가서는 그의 사후, 아들 당 고종 이치의 황후가 되었다가 결국엔 황제에 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사실상 60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두른 인물이었다.

 

그럼 이제 그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자! 사실 측천무후는 원래 당고종의 황후가 될 수 없었다. 위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아버지의 여자를 아들이 취한 다는 것은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일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왜 당 고종 이치는 그런 후안무치한 짓을 저질렀을까? 이야기는 이치가 아직 태자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치는 병상에 누운 아버지 당태종을 열심히 간호했다. -어쩌면 마음엔 없지만, 효성스런 아들로 비춰져야 했으니까 억지로 하는 척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측천이 그에게 애틋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측천은 고종 이치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치는 성격이 온순하고 상냥한 편이었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같은 대신들이 그를 황태자로 강력하게 지원한 이유는 호랑이 같은 당태종 휘하에서 제대로 권력을 휘둘러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치같이 유약한 인물이라면 마음대로 전권을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착각은 당고종 이치의 왕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소생이 없었다. 반면에 당 고종의 총애를 받는 소숙비에겐 아들이 있었다. 궁중암투를 벌이고 있던 왕황후는 측천을 궁에 끌어들이면, 당연히  소숙비를 견제할 수 있을거라 착각했다. 결과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었다.

 

원래 측천은 당나라 때의 법도에 따라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 들어가야했다. 그러나 측천은 꽃다운 자신의 인생을 결코 비구니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목숨을 걸고 당 고종을 유혹했고,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

 

그렇다고 당 고종이 감업사에 간 측천을 바로 부른 것은 아니었다. 황제에 오른 이후 정신이 없었던 고종은 아버지의 분향차 다시 감업사에 들렸다가 측천을 보고 그제서야 황실로 데려오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왕황후의 승낙이 주효했다. 그녀가 반대했다면 측천의 인생은 비구니로 끝났을 것이다-

 

왕황후가 측천의 본 모습을 알게 되는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국 왕황후와 소숙비가 힘을 합치기 시작했고, 측천은 위기를 느꼈다. 그리고 무서운 사건이 벌어진다. 왕황후가 측천 소생의 공주를 보러왔다가 나간 이후, 강보에 쌓인 아기가 죽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에 당 고종은 크게 분노하고, 즉시 폐서인을 시키려 한다. 그러나 측천은 이에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우선 왕황후가 아기를 죽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슬하에 자식이 없는 왕황후가 공주를 무척 예뻐한 것은 사실이었으며, 만약 그녀가 죽였다고 해도 아마 아기를 돌볼 줄 모른 나머지 실수였을 가능성이 높았다. 오히려 주변에선 측천이 왕황후를 모함하기 위해 고의로 자식을 죽였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가들은 측천이 자신의 공주를 죽인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무엇보다 그녀가 반대한 이유는 아직 왕황후를 폐서인 하기에는 시기와 명분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좀더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왕황후는 변호하는 척해 더더욱 당 고종의 환심을 더욱 사기 위한 계산도 있었다.

 

어쨌든 이 일로 당고종의 왕황후를 향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게 커지게 된다. 물론 측천은 반대만 하고 손 놓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황금을 풀어 황궁내에 자신의 편을 만들어 나갔다. 특히 왕황후 주변의 궁녀들과 환관을 매수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 결과, 왕황후가 황제와 비빈들을 저주했다는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이 역시 왕황후가 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측천이 왕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어찌되었건 당 고종은 병상에 누워있었고, 침이 꽂힌 인형이 발견된 것에 대해 왕황후의 변론은 먹히질 않았다. 문제는 이때까지 장손무기를 비롯한 고명대신들이 당고종과 측천을 너무 만만하게 봤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강력하게 주장하면 당고종이 말을 들을 거라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착각이 깨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수량은 왕황후의 폐위에 반대하면서 그녀가 폐위될만큼 잘못한 게 없고, 설혹 그녀가 폐위되더라고 측천이 아니라 명문가 규수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당 태종을 들먹이며 권위로 당 고종을 찍어누르려 했다.

 

당시  28세의 팔팔한 나이이자, 6년이나 황제를 지낸  당 고종은 저수량의 말에 불같이 노했다. 그는 유약한 사람이긴 했지만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했다. 훗날 당고종이 당태종의 유언을 거스르면서까지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은 아버지를 능가하는 업적을 세워,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정관의 치를 이룩한 것으로 유명한 아버지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 만으로 초조하게 된 당 고종의 마음을 당시의 대신들은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저수량은 잘못 걸린 케이스였다. 당고종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를 당장 사형에 처할 것을 명했고, 놀란 대신들이 변호하는 덕분에 간신히 목숨은 건져서 유배형으로 끝났다.

 

당고종은 결국 자신의 고집대로 밀고 나갔다. 6551013일 왕황후와 소숙비를 폐위하고, 19일 소의 무씨를 황후로 세운다는 조서를 발표했다. 이치가 조서를 내린지 사흘 만에 측천은 고종에게 한원과 내제에게 포상을 내려달라고 부탁한다. 한원과 내제는 측천을 황후로 내세우는데 가장 반대한 신하들이었다.

 

그런 신하들에게 은전을 내림으로써 자신의 도량을 보이고,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것이었다. 한원과 내제는 은전을 받으면서 떨떠름했다. 그들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측천이 황후가 된지 26일지 지나자,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자결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2년 뒤 한원과 내제는 강등되었고, 4년 뒤에는 장손무기가 죽임을 당했다. 물론 그들의 죄는 모반이었다. 한원 역시 모반혐의에 걸려들었으나, 이미 사망한 뒤라 의미가 없었다. 내제는 더욱 행복한 케이스로, 돌궐과의 전쟁중에 사망해서 측천의 모함에 걸리지 않고 명예로운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다.

 

655111일 측천은 성대한 의식을 치루며 당나라의 황후가 되었다. 원래 황후가 될 수 없었던 신분의 여인은, 당태종의 여인이었음에도 비구니가 되지 않고, 이렇게 당 고종 이치의 황후로 봉해지게 되었다. 이제 남은 일은 그녀가 자신의 역량을 슬슬 펼쳐보이는 것이었다!

 

참고: <품인록>, <권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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