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덕만에게 KO패 당한 미실

朱雀 2009. 6. 17.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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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8화에서 만난 두 주인공 덕만과 미실. 그러나 두 번에 걸친 설전은 모두 일방적인 덕만의 승리로 끝났다.


8화에선 드디어 덕만과 미실이 만났다. 그리고 설전을 펼쳤다! 아! 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인가? <선덕여왕>의 두 주인공이 마침내 조우하기까지 거의 한달이 걸렸다. 그런데 결과는? 무려 두 차례나 두 사람은 만났건만 번번히 덕만이 압도적으로 미실을 이겨버렸다. 기대에 비해 너무 싱거운 결과였다.

첫 번째부터 살펴보자! 덕만은 미실에게 잡힌 죽방 일행을 구하기 위해 감히 임금님이 계신 관가로 무작정 찾아간다. 거기서 마침(?) 용춘공을 만나 진평왕을 비롯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미실과 조우하게 된다.

덕만은 자신이 여래사에 있었고 거기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는 걸 목격했다고 증언하고, 거기에 미실의 아들인 보종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덕만은 임금님을 비롯한 지체 높은 이들이 있음에도 특유의 뻔뻔함으로 당당한 태도를 유지한다. 반면 미실은 어떤가? 덕만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고 주도권을 챙기는 동안, 입도 제대로 뻥긋하지 못한다. 드라마를 시청하는 내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리곤 갑자기 화면이 전환된다. 천명공주과 단 둘이 만난 미실은, 김유신 일가를 서라벌로 불러들이는 조건으로 여래사 사건을 덮기로 한다. 그리고 천명공주을 마음껏 협박한다. 이래서야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한 누군가(혹은 집단)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설마 현 상황에 대한 풍자?)?

미실이 누구인가? 미천한 소생으로 태어나 미모 하나로 신라 황실을 손아귀에 틀어준 천하의 여장부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왕을 폐할 정도로 모략에 능하고 엄청난 권력을 쥔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어디서 근본도 알 수 없는 일개 낭인에게 쩔쩔 맨다면 그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여하튼 두 번째로 넘어가보자. 문노의 행방을 알고자 미실궁을 찾던 덕만은 결국 미실궁주앞에 끌려온다. 여기서도 답답하다. “문노를 찾으러 간 것이냐?” 라고 미실이 묻자, 덕만은 “그걸 말씀드릴 이유는 없습니다.”라며 또 한번 강펀치를 선사한다. 이번엔 순순히 당하지 않으려는지 문노의 행방을 집요하게 묻는 덕만에게 미실은 자신의 아들 보종이 이끄는 일월성도를 이기는 날 알기주기로 약조하고 헤어진다. 나름 미묘한 표정변화를 보이며 대응했지만, 이번 설전에서도 미실은 패했다.

실망의 연속이었다. 미실이 누군가? 진평왕을 허수아비로 내세운 권력의 핵심 아닌가? 그녀가 어디서 나타난지 알 수 없는 ‘듣보잡’에게 일방적으로 몰리다니. 이건 정말 아티다.

물론 제작진의 의도는 모르는 바 아니다. 후일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의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최대한 부각시킬 의도였으리라. 그러나 주인공이 빛나기 위해선 악당이 강해야 하는 법이다. 미실은 덕만과 한치 양보 없는 불꽃 튀는 설전을 펼쳐야 했다.

첫 번째 조우에서 보종을 가리키며 주범으로 증언했을 때, 칼을 빼들어 치던지 아님 주변의 호위군사들을 시켜서 입을 막던지. 여하튼 무슨 행동을 펼쳐야 했다. 것도 아니라면 그동안의 궁중암투로 다져진 임기웅변을 선보여야 했다. 일방적으로 입도 제대로 뻥긋하지 못하고 다소 당황하는 표정만 짓는 것은 여태까지의 미실을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두 번째 조우에선 조금 낫지만, 여전히 답답하다. 이번의 대결 장소는 자신의 홈그라운드 아닌가? 게다가 덕만을 제외한 모든 이는 자신의 부하다. 부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뭔가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말로는 다소 밀릴 수 있어도 권위와 기품 등에서 뭔가 ‘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은 줘야 했다. 그러나 두 번째도 그런 건 없었다. 물론 덕만에게 일종의 거래를 제안하는 건 발전된 모습이지만 대화의 주도권을 전혀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미실의 모습은 실망적이기 그지 없다.

이건 1차적으로 제작진의 잘못이다. 미실은 이후 덕만과 더불어 <선덕여왕>에서 계속해서 대립할 숙명의 라이벌 관계다. 처음부터 인상적으로 조우하고, 만날 때마다 시청자에게 긴장감을 줘야 한다.

물론 잘 안다. 50부작이 넘는 드라마를 찍으면서 매회가 재미있고 충실하게 찍을 순 없다는 사실을. 그래도 중요한 장면에선 역시 뭔가 한방이 필요하다. 억지설정이 연속인 6화에선 그래도 덕만이 가야계 유민들이 사는 마을에서 비를 내리게 하는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삽입해 여지를 남겼다. 그러나 7화는 억지설정의 극치였고, 마침내 덕만과 미실이 만난 8화에선 이렇다 할 임팩트 있는 장면이 없었다.

8화 내용을 살펴보면 뭔가 한방을 줄만한 장면이 몇 개 있었다. 우선 덕만과 미실이 처음 조우한 장면이 그랬고, 이후 서라벌로 올라온 김유신과 용화낭도가 보종이 이끄는 일월성도의 음모로 천명공주가 내려준 깃발이 반으로 찢기는 모욕을 당하는 부분이 그랬다.

난 그 다음 장면에서 김유신이나 덕만이 기지를 발휘해 그들이 받은 수모를 고스란히 되갚아주고 깃발을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김유신은 덕만에게 모래주머니를 차게 하고 구보만 하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김유신은 덕만에게 억하심정이 있는지 모래주머니를 점차 늘려 착용하게 하고 달리게 했다. 이래서야 김유신이 미실의 부하로 덕만을 괴롭히고 있대도 믿을 지경이다.

8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당황스러웠다. 모래주머니를 각각 양다리에 3개씩 차고 구보를 마친 덕만이 물이 채워진 말구유통에 얼굴을 몇 번이고 파묻는데 카메라가 돌더니 어린 덕만에서 이요원으로 바뀐다.

첫 대사는 “내가 꼴찌 아니지?"였다. <선덕여왕>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이요원이 이렇게 등장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대사라니. 이 얼마나 폼 안나는 등장인가?

<선덕여왕>의 제작진은 각성해야 한다. 1, 2화에 보여줬던 밀도 있는 진행까진 아니더라도 TV앞에 시청자들이 앉아서 볼만한 무언가를 줘야한다. 그게 뭐가 되었건 말이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같은 시간대에 방영중인 다른 드라마에 시청자를 빼앗길 수 있다. <선덕여왕>은 이제 겨우 8화가 방송되었을 뿐이다. 아직 고정시청자를 확보했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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