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화이야기

거북이 달린다 - 당신은 웃기는가? 나는 눈물이 난다.

朱雀 2009. 6. 20.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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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김윤석! <추격자>에 이어 김윤석은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아니 200%를 채워준다. 그의 디테일한 연기는 시골형사 조필성이 살아있는 인물로 만들어낸다.


예고편을 보고 별 볼일 없는 시골형사가 탈주범을 잡기 위해 벌이는 소동을 그린 해프닝쯤으로 생각했다. 예고편은 코믹적인 요소를 엄청나게 강조했기에 딱 오해하기 좋았다. 그러나 <거북이 달린다>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이건 블랙 코미디다.


김윤석이 연기하는 조필성 형사는 별 볼일 없는 촌구석 충청남도 예산의 형사다. 그는 적당히 세속에 물든 사람으로 마을 유지들에게 뒷돈을 받고 다른 불법영업장을 덮치는 짓도 하지만, 근본적으론 마누라에게 당당하고 자식들에게 하염없이 베풀고 싶은 가장이다. 그러나 박봉의 월급에 시달리는 그로서는 허구한 날 만화방 가게에서 양말을 펴는 작업을 하는 아내에게 잔소리나 듣고, 딸에게 위로를 받는 초라한 소시민일 뿐이다.


영화는 약 3분의 1 정도의 시간을 할애해 시골형사의 일상을 훑는다. 중간중간 웃긴 장면에 다른 관객들은 낄낄거리며 봤지만, 나는 속으로 ‘도대체 언제 탈주범과 한판 뜨는 거야?’라고 되묻고 있었다.


본의 아닌 실수로 정직 3개월을 당한 조필성이 목돈이 걸린 내기 결승에서 우연히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고, 아내의 비상금을 털어 걸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고조되어 간다. 3백만원을 1천8백만원까지 불린 그는 아내에게 간만에 큰 소리를 칠 기회에 기뻐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탈주범 송기태가 그 돈을 가져가게 되고, 마침내 둘은 만나게 된다.


당연하지만 시골형사가 탈주범을 이길 리 없다. 수갑을 내밀며 위세를 과시하던 조필성은 송기태에게 무참하게 얻어터진다. 그리고 실신할 때쯤 송기태는 담뱃불로 그의 목에 낙인을 찍고 사라진다. 이튿날 아침 깨어난 조필성은 잃어버린 1천8백만원과 탈주범 송기태를 자신이 만났다는 사실을 동료 형사들까지 믿어주지 않는 억울한 처지에 놓인다.


이후 영화는 조필성과 송기태의 쫓고 당하는 모습을 화면 가득 보여준.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은 다면적인 모습을 보인다. 조필성을 위시한 시골형사들은 처음엔 촌구석에서 별 볼일 없이 지내는 무능력한 시골형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소싸움 대회를 위해 소주인들에게 전화하고,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고 쓸데없는 농담을 지껄이고. 송기태를 잡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형사들은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모습만 보인다. 그러나 후반부에 가면 시골형사(조필성)은 특유의 인내와 끈기로 송기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다. 별 볼일 없던 그의 동료들도 마지막엔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탈주범 송기태역의 정경호는 너무 착하고 잘생긴 외모와 도무지 악한 구석을 찾아볼 수 없는 순한 눈빛에서 위화감이 생길 정도다. 덕분에 경찰을 따돌리는 그의 치밀함과 수십명이 몰려와도 물리쳐내는 놀라운 싸움 실력등은 왠지 맞지 않는다. 차라리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김윤석과 더불어 투톱 체제를 이뤄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지 않았을까? 싶다.


<거북이 달린다>에서 가장 빛나는 인물은 역시 김윤석이다. 2007년 <추격자>로 선 굵은 연기를 보여준 그는 이번에 <거북이 달린다>에서 소시민 가장이자 특유의 끈기와 기질을 발휘하는 시골형사 조필성의 연기를 훌륭하게 해낸다. 그의 빛나는 열연 덕분에 영화의 완성도는 한층 높아졌고, 다소 무리한 설정들도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자신에게 옷가지를 챙겨주고 용돈으로 준 만원을 물리치는 딸에게 “조심해서 들어가”라며 안쓰러운 눈빛을 보내는 부분을 비롯해, 등장하는 모든 장면에서 손동작 하나 눈빛 하나를 모두 계산해서 연기해 조필성이란 인물이 마치 우리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느끼게끔 만든다.


아쉬운 것은 그와 대척점을 이루는 탈주범 송기태다. TV 드라마에서 많은 활약을 펼친 정경호는 착한 얼굴과 대비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에게 탈주범 송기태 역은 역시 맞지 않는 옷이었다. 평상시에는 조용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겐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자신을 뒤쫓는 형사들에겐 인정사정없는 폭력과 치밀한 계획범죄를 저지르는 다층적인 모습을 이끌어내는 덴 설득력이 떨어졌다. <추격자>의 하정우처럼 싸이코패스는 아니더라도, 뭔가 내면의 여러 가지 면들을 끄집어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들이 보이질 않았다. 또한 그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다방레지역의 선우선 역시 아쉽다.


다방 레지가 그렇게 청순하고 이쁜 것도 말이 안 되지만, 마치 비운의 여주인공 같은 처지에 속하는 그녀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거북이 달린다>는 김윤석의 열연과 그의 부인을 맡은 견미리, 끝까지 도와주는 친구 용배역의 신정근 등의 조연에 힘입어 매우 좋은 모양새를 갖췄지만, 대척점에 있는 악당의 이미지가 확실하지 않아 명작이 되기엔 2% 모자란다. 만일 <추격자>의 하정우처럼 김윤석과 제대로 맞짱을 뜰 수 있는 배우가 맞았다면 <거북이 달린다>는 명작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을 거다. 그래서 더욱 아쉽다.


아쉬움은 남지만 <거북이 달린다>는 확실히 잘 만든 영화다. 자칫 식상하거나 헛웃음이 돌 수 있는 장면들이 조연과 엑스트라들의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한 연기 덕분에 ‘감초’역할을 톡톡히 한다. 그러면서 송기태와 부딪칠 때마다 정직, 파면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점차 막다른 골목에 몰리는 조필성의 처지가 사뭇 가슴 아리게 다가온다.

 

송기태와 조필성의 마지막 대결 장면. <추격자>의 처절한 격투신이 떠오를 만큼 참혹했다.


<거 북이 달린다>가 슬픈 이유는 조필성 때문이다. 그는 시골형사로 마누라한텐 기도 못펴지만, 동네에선 제법 알아주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번의 실수로 3백만원을 잃고 아내에게 면목이 서지 않고, 명예회복을 위해 다시 달려든 송기태 검거에 실패하면서 결국 자신의 새끼손가락까지 잘리는 불행을 맛본다. 경찰들마저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는 가운데,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가족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는 모습은 오늘날 위기에 처한 40대 가장들의 모습과 별반 다름없으리라. 영화와 현실이 다른 점이 있다면, <거북이 달린다>는 다행히 조필성이 송기태를 검거하고 명예를 회복해 가족에게 당당한 아빠가 되어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의 우리 아버지들은?


<거 북이 달린다>는 여러모로 인상적인 영화다. 예고편은 코믹적인 부분이 매우 강조되어 있지만, 기실 영화는 권위는 상실하고 경제적으로도 무능력한 국내 40대 가장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점점 더 몰락하는 조필성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눈물겹다. 비록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현재의 현실은 그렇지 않기에 마냥 웃을 수 없었다.


당신께 이 영화를 추천한다. 많이 웃을 것이다. 그리고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또한 많이 곰씹게 될 것이다. 엔딩 자막이 올라갈 땐 박수를, 관람후엔 지인들과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여러 모로 칭찬해줄 장점이 많은 영화다.


 

제가 참가하고 있는 영화 팀블로그 '뻔씨네(http://funcine.net/)'에 쓴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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