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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 3

통일 중국을 놓고 장개석과 끝까지 겨룬 장작림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장개석은 분열되어있던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장작림과 마지막까지 싸워야했다. 장작림은 동북왕으로 불리긴 했지만, 그의 야심은 ‘만주의 패자’가 아니었다. 바로 중국을 통일한 패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그런 야심을 채우기 위해 자신의 적이었던 오패부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승승장구하자 북진해오자, 이를 기회로 삼아 1925년 9월 7일 북경에 입국하고, 11월 30일 안국군 총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 6월 18일 북경에서 대원수로 취임했다. 장작림이 급하게 대원수에 취임한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군의 무력이 너무나 강했다. 장작림과 연합한 군벌 손전방과 장종창이 형편없이 밀려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장개..

손문조차 어려워한 만주군벌 장작림

장작림(장쭤린) -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중국 근대사를 보면,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가 있다. 바로 1912-1949년까지의 ‘군벌시대’다. 우린 흔히 1911년 신해혁명이후, 손문의 국민당 정부와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중국을 이끈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는 약 40년에 이르는 혼란기에 대해 관심이 없는 탓이 크다. 당시 중국의 영토는 현재와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앙의 권력이 공백이 생기면, 각 지역의 권력자들이 실제로 지역의 ‘왕’으로 통치하는 형편이 되었다. 일례로 1911년 신해혁명을 성공한 손문이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이 되었다가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겨준 것은, 그가 막강한 군벌이었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1915년 시대를 잘못 해석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

왜 중국은 100년이나 아편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아편의 재료가 되는 양귀비 -사진출처: 위키백과 중국 관련도서를 읽으면서 한 가지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은 왜 아편에서 벗어나는데 100년이 넘게 걸렸을까?’였다. 우리가 아는 아편전쟁은 1842년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에게 굴욕과 더불어 ‘아편’이 중국에 공공연하게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에서 흑자를 보기 위해 아편을 뻔뻔하게 유통시킨 당시 서구열강의 태도도 놀랍지만, 그 이후 아편이 중국에 일으킨 문제를 보면 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아편은 중국인들을 중독시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지기 전까진 맹위를 떨쳤다. 1880년대는 4천만명이 흡연자고 전체 인구의 5%인 2천만명이 ‘중독자’가 될 지경이었으니 그 폐해는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아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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