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21세기 초강대국?!

손문조차 어려워한 만주군벌 장작림



장작림(장쭤린) -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중국 근대사를 보면,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시대가 있다. 바로 1912-1949년까지의 군벌시대. 우린 흔히 1911년 신해혁명이후, 손문의 국민당 정부와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이 중국을 이끈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이는 약 40년에 이르는 혼란기에 대해 관심이 없는 탓이 크다. 당시 중국의 영토는 현재와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앙의 권력이 공백이 생기면, 각 지역의 권력자들이 실제로 지역의 으로 통치하는 형편이 되었다.

 

일례로 1911년 신해혁명을 성공한 손문이 중화민국의 임시대총통이 되었다가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총통직을 넘겨준 것은, 그가 막강한 군벌이었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1915년 시대를 잘못 해석하고 자신이 직접 황제가 되려했으나, 여론의 혹독한 반대를 받고 결국은 스스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당시 원세개 역시 막강한 군벌이긴 했으나, 흔히 말하는 통일을 이룬 상태는 아니었다. 예를 들어 당시 동북삼성을 다스리는 이는 동북왕으로 불린 장작림이었다.

 

장작림은 원래 가난한 농사꾼의 자식이었다. 그는 마적단을 운영하다가 청황조에 귀의해 일개부대장이 된 이후, 갖은 모략과 암투를 통해 결국 만주를 다스리는 막강한 군벌이 되었다. 전성기때는 무려 80만 대군과 다른 군벌들이 두려워할 정도의 해군력(21척의 함정과 3,300여명의 해병)과 공군력(300)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손문은 1913년 혁명을 실패하고, 일본으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중화혁명당을 결성하고 이후 1917년 광저우에서 군정부를 수립하고 대원수가 된다. 그가 스스로 대원수가 된 것은 군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스스로 군사력의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1921년 북벌을 준비하던 손문은 광주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상해로 홀홀단신으로 피신가는 상황에 처했을 때가 있었다. 이때 도와준 이가 바로 만주군벌 장작림이었다. 장작림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손문에게 아무런 조건을 내걸지 않고 몇십만원에 이른 엄청난 자금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등을 보내 손문이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만약 이 당시 손문이 장작림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상해에서 비분강개한 마음만 가득 한 채, 아무런 일도 도모해보지 못하고 씁쓸한 종말을 맞이했을지 모른다. 따라서 손문이 장작림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친히 열통이 넘는 편지를 써서 보낸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1922년 제 1차 직봉전쟁은 표면적으론 직계와 봉계의 군사적 충돌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영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 도사리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직계를 원조해서 이득을 보려했고, 일본은 새롭게 떠오른 장작림의 봉계를 지원해 차후 중국대륙을 집어삼킬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19221차 직봉전쟁은 직계에 밀려 봉계가 패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작림은 곽송령과 아들 장학량의 눈부신 전과로 인해 자신의 본거지는 지켜내게 된다. 이후 장작림은 군기를 엄하게 하고, 각국으로부터 인재를 끌어 모으면서, 군의 현대화와 전문화를 꾀한다. 덕분에 봉계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서 19242차 직봉전쟁에선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때 장작림은 조곤과 오패부에 맞서 손문-단기서와 함께 동맹을 맺는데, 이를 삼각동맹이라 부른다. 여기에 더해 장작림은 당시 베이징에서 권력을 장악한 조곤 총통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풍옥상을 회유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해서, 쉽게 베이징을 함락하는 계가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2차 직봉전쟁이 끝난 이후, 장작림은 그의 본심을 드러낸다. 풍옥상은 배제한 채 자신이 모든 이득을 취하려고 한다. 물론 그는 자신보다 서열이 위인 단기서를 총통에 오르게 함으로써 낮은 위치를 점하지만, 조곤 휘하에 있던 군대중 절반이상을 차지하고 진포선 일대에서 장강 하류까지 기름진 지역을 모조리 독점하게 된다.

 

손문에게 감회되어 있던 풍옥상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실력이 없어서 참는 수밖에 없었다. 명목상 국가 수반이 된 단기서 역시 장작림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손문은 통일 중국이란 원대한 꿈을 가지고 1924년 영풍호를 타고 부인 송경령과 함께 북상하게 된다. 그는 애초에 자신과 군벌들이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벌들은 나라와 민족에 대해선 아무런 생각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는 이기적인 인간들인 탓이었다. 따라서 손문이 꿈꾸는 위대한 중국을 위해선 군벌들은 사라져야 할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천진에 도착한 손문은 지병인 간질이 발작해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라걱정에 그는 각계 인사들을 만나 국사를 도모했다. 그중에는 그의 은인이자 숙적인 장작림도 있었다.

 

장작림에 와병중인 손문에게 접근해서 외국과의 긴밀한 협조를 이룩하고, 러시아 공산당과 결연할 것을 은근히 권한다. 당시 손문은 서구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파기하고, 러시아와 손잡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웃음을 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두 차례에 걸친 장작림과 손문의 만남은 결렬이 됐고, 와병중임에도 손문은 병석에서 일어나 19241231일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에선 손문을 맞이하기 위해 10만명이 운집했으나, 너무 무리한 탓일까? 손문은 결국 1925312일 서거하고 말았다.

 

손문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1924년 제 1차 국공합작을 실시했으며, 삼민주의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은 근대중국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911년 무창봉기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의 계획(신해혁명)과는 상관없이 갑자기 일어나 사건이었고, 잠시 정권을 잡았던 그는 북양군벌인 원세개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그는 원세개에 쫓겨서 일본으로 도망가고, 1921년 세운 광둥정부에서 반란으로 인해 수세에 몰리는 일을 줄줄이 당해야 했다.

 

다행히 장작림의 도움으로 재기에 성공했으나, 결국 단기서-장작림 등의 방해로 인해 그가 꿈꾸던 통일된 중국의 꿈은 이룰 수가 없었다. 장작림은 우리에겐 무단통치로 익숙한 데라우치 마사타게의 후원을 받은 친일파 인사였다. 이런 장작림의 모습은 그만의 모습이라기 보단, 당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무엇이든 하는 군벌의 대체적인 양상이었다. 따라서 이런 군벌시대를 이해하는 것은 1950년에 이르기까지 중국-한국-일본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라 할 수 있겠다.


 

 

참고: <만주군벌 장작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