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사마천이 선택한 중국의 시조, 황제

朱雀 2011. 3. 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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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조로 추앙받는 황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예전에 중국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우연히 역사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는 자신을 한족으로 소개하면서 몽골이 세운 원나라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스스럼없이 우리의 역사라고 말했다. 청나라야 그렇다 치더라도, 몽고족의 후손들이 버젓이 살아서 초원에서 나라를 이루며 살고 있는데, 그들을 싸악 무시하고 말하니 씁쓸한 미소만이 감돌았다.

 

특히 그는 힘주어서 자신을 황제의 후손이라고 했는데, 당시만 해도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하는 황제에 대해 그렇게 자부심이 높은지 잘 몰랐다. 이후 최근에 중국에 대해 이런저런 서적과 정보를 찾아보면서 황제라는 단어를 자주 접하게 되었다. 마치 성경에서 믿음의 조상으로 꼽는 아브라함처럼, 그들이 황제로 시작해서 족보를 읊어대는 광경을 자주 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새삼 중국인이 얼마나 역사에 관심이 많고 얽매여 있는지 알게 되었다. -하긴 이건 우리나 일본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렇다면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시조로 꼽는 황제를 최초로 기록한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사기>를 지은 사마천이다. 그는 오제본기에서 황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황제는 소전 부족의 자손으로, 성은 공손, 이름은 헌원이라고 불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신령스러웠고, 태어난지 얼마 안되어서 말을 할 수 있었으며, 어려서 매우 영리하였고, 자라면서는 영민했으며, 어른이 되어서는 널리 보고 들어서 사리분별이 분명했다...

 

이후 내용을 살펴보면 황제는 신농씨 시대의 사람이며, 신농의 힘이 점차 약해지자 지방의 제후들이 제멋대로 굴자 이를 징벌했고, 유일하게 마지막까지 치우가 말을 듣지 않자 탁록에서 대전을 벌여 마침내 꺾고, 모든 제후들의 추천을 받아 신농씨에 이어 중원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진시황제의 황제라는 명칭은 중국의 역사상 가장 성군이었다는 전설적인 삼황오제의 준말이다. , 진시황제가 삼황오제보다 더 훌륭하다는 뜻으로 지은 말이다. -하긴 중원을 사실상 최초로 통일한 인물은 이론의 여지없이 진시황제로 꼽고 있으니, 그가 최초로 시작한다는 시황제라는 칭호를 쓴 것도 일리는 충분하다-

 

자 그럼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보자! 왜 사마천은 하고 많은 신화 속 인물중에 황제를 골랐을까? 황제 이전에도 복희와 여와 그리고 신농 외에도 전설적인 인물들이 많았다. 그리고 사마천이 황제를 거론하기 전까지 황제는 중국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에선 그 이유를 사마천이 유학을 지극히 숭상한 유학자라는 데서 우선 찾는다. 사마천이 살던 시기는 한무제가 다스리던 전한때로 이미 황제시대로부터 몇 천년이 흐른 뒤다. 아무리 공자의 춘추필법을 본받아서 남아있는 자료를 모두 찾고, 현지답사를 해도 몇십년전의 일도 아니고, 아직 문자도 없던 시절의 이야기를 완벽하게 담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마천이 <오제본기>를 쓸 때 가장 많이 참고한 서적으론 <세본>으로 알려져 있다. 전국말기에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세본>은 현재 원본이 남아있지 않다. (<세본>은 다른 책에서 인용한 형태로 약간씩 남겨져 있다)그리고 남겨진 기록만 봐도 분명 다른 신화로 기록되는 염제와 신농을 합쳐서 기록하고 있다.

 

<세본>의 남겨진 기록을 유추해볼 때, 전국말기 유학자들이 통일 왕조가 이어졌다는 이른바 대일통사상을 위해 억지로 끼어 맞추었다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그런 사정을 사마천이 전혀 몰랐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는 황제를 중국의 시조의 자리에 놓았는가?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에선 사마천이 한 작업은 황제를 중국인의 시조가 아니라, -한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시조로 놓은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알기로 중국역사는 하--주를 거쳐 진-한까지 이어진 것으로 안다. 춘추전국시대는 견융의 침입을 받고 기원전 771년 유왕이 살해되고 난 뒤, 호경(시안)에서 낙읍(뤄양)으로 이동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추시대의 봉건제후들은 주나라의 국운이 쇠하자 겉으로는 주왕실을 충성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자기들끼리 패권을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춘추시대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사실일까?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자료들은 대다수가 한족에 의해 쓰여졌다는 사실이다.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한족의 사가들은 지극히 자신들에게 이롭거나 혹은 견해에 따라 역사를 취사선택해서 기록했다. 따라서 사실은 동주는 무시한 채, 수십개의 나라들이 서로 중원통일을 위해 다퉜을 가능성도 상당하다. -주나라가 천하를 다스렸다고 하지만, 이 역시 아닐 수 있다. ‘동주라는 나라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렇지만 유학자들이 보기에 각자의 나라들이 서로 패권을 잡기 위해 싸우는 모습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반드시 질서가 부여되어야 했다. 비록 그것이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이런 유학자들의 입장을 중국의 역대왕조들이 받아들인 것에도 이유가 있다. 우선 정통성과 적법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황제를 시조로 받아들이면, 이전 왕조와도 일종의 혈연관계가 형성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일단 개국하기 전까진 전왕조는 원수지만, 일단 세우고 나면 최선을 다해 인정(?)해야 한다.

 

왜냐고? 그렇다면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없기 때문에, 누구나 왕조를 열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자는 하늘이 고르고, 특별한 인물만이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것. 어렵게 왕조를 연만큼 누구나 자신이 왕조가 영원무궁까진 아니더라도 천년만년 이어지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중국은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수백개의 나라들이 왕조를 열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따라서 학자들의 입장에선 통일되어 혼란을 최대한 피할 이유가 있었고, 황제의 입장에선 자신이 나라가 황제로부터 시작되어 쭈욱 이어져온 정통성과 합법성을 부여받은 나라이기 때문에, 천명이 이어지는 한 계속 이어져야 할 당위성이 있었다. 사마천이 황제를 시조로 택하고, 역대왕조가 그걸 인정한데는 바로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마치 신약에서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내세워 적법성을 드러냈듯이-

 

그러나 사마천이 하고자 했던 바는 중국인 전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중원을 다스릴 황제와 그들의 일가에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아마 그는 황제가 오늘날 모든 중국인의 시조가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음엔 어떻게 황제가 중국인들의 시조가 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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