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일본 관동군은 왜 장작림을 암살했는가?

朱雀 2011. 3. 2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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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192864일 장작림은 북경에서 심천으로 향하던 열차를 타고 가던 중에 차량폭발로 죽고 만다. 이는 당시 일본 관동군이 모의해서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왜 일본군은 장작림을 폭사라는 끔찍한 형태로 제거했을까?

 

장작림은 잘 알려진 대로 친일파 인사였다. 그는 일본계 인사들과 친분을 두텁게 함으로써 장개석과 최후까지 중국을 놓고 다툰 일세의 효웅이 되었다. 그러나 장작림은 비록 친일파 인사였지만, ‘국가와 민족을 팔아먹는 짓까진 하지 않았다.

 

장작림은 위태로운 시기에 일본에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다스리는 만주지역의 철도권을 넘겨달라는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우선 이는 중국인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문제였다. 또한 당시 중국인들은 일본인에 대한 배타적인 감정이 심했다. 따라서 지배자가 되길 원하던 그의 입장에선 당연히 민심을 거스리는 행위를 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철도는 산업적-군사적으로 절대 필요한 시설이었다. 장작림은 처음에는 일본이 관장하는 남만주철도를 이용했으나, 일본의 허락과 간섭이 심해서 이용에 불편함이 많았다. 당시 철도는 광활한 중국 대륙을 이동하는 데 필수적인 교통수단이었다.

 

당시 철도는 한꺼번에 대량으로 인원과 무기를 빠른 시간 안에 수송할 수 있었고, 중요한 귀중품이나 자원들을 목적지까지 이동시켜주었다. 따라서 전쟁을 수행하고, 물자와 자금이 필요한 군벌과 일본 관동군에겐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그는 독자적인 철도건설을 감행했고, 이는 당연히 일본의 반발을 불러왔다. 처음에 일본은 장작림을 잘 구슬려서 이용하려 들었으나, 그가 계속 말을 바꾸고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자 결국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다.

 

이야기를 19285월로 돌려보자! 당시 패색이 짙어진 장작림은 장개석에게 휴전제의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1차 직봉전쟁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본거지인 동북삼성으로 돌아가 권토중래하기로 마음먹는다.

 

사실 장작림이 무리만 하지 않았다면, 그가 다스리는 동북삼성에서 나오는 자금과 물량이 충분했기 때문에 그는 충분히 동북의 패자로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다. -일본의 관동군조차 그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그러나 통일 중국의 주인이 되고 싶었던 야망 때문에, 자신의 능력 이상의 땅을 다스렸고 이는 자금부족과 부정부패와 군기해이 등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당시 일본은 본거지로 돌아가는 장작림을 협박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고자 했다. 바로 원세개에게 그랬듯이 21개 요구조항을 내밀어서, 만주와 몽골지역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고자 한 것이다. -이런 야욕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이룩된다-

 

그러나 장작림은 일본의 도움이 절실한 순간에도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는 짓엔 결코 동의하지 않았다. -처음에 일본은 장작림이 마적출신에 배운 것이 별로 없어서 쉽게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착각했다. 그러나 장작림은 공군과 해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아들 장학량을 해외로 유학을 보내고, 파격적인 조건으로 국내외 전문가들을 초빙할 정도로 나름 시대를 읽을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인물이었다- 거듭되는 협박과 구슬림에도 넘어오지 않자, 당시 관동군과 일본 수뇌부는 회의에 회의를 반복한다. 그리고 결국 장작림을 제거하는 데 동의한다.

 

일본군은 장작림의 제거를 위해 나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 그들은 처음엔 요원을 보내 암살할 것을 고려했으나, 항상 호위부대와 함께 움직이고, 이전에도 두 번 정도 실패한 경험이 있었던 까닭에 철도폭파로 방향을 튼다.

 

1927년 관동군은 다른 열강들의 눈치를 보기 위해, 장작림이 타고 다니는 열차가 아니라 선로를 폭발해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론은 러시아와 남경정부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누구도 일본을 생각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일본 수뇌부는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아울러 나중에 발뺌을 위해 아편쟁이였던 세 중국인을 섭외해서 잘 먹고 입힌 다음, 192864일 새벽 5시 황고둔 역에서 풀어준 다음 죽여 이들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일이 잘못 되려는지 한명이 도망가고 말았다. 그리고 도망간 한명은 일본군이 자신에게 한 행동을 봉천성에 가서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전의 주장대로 남방 편의대원이 폭발물을 던져 장작림을 살해했다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장작림은 일본이 자신을 노린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가 원래 예정했던 61일이 아니라 두 번이나 걸쳐서 취소를 거듭하며 4일 날 출발한 것은 혼선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요원을 풀어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다. 아울러 일본군 인사를 두명이나 동승시켜, 그의 의심을 풀어주었다.-물론 이들은 중간에서 사정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내렸다-

 

원래 일본 관동군의 목적은 단순히 장작림 제거에만 있지 않았다. 그들은 폭사라는 거창한 이벤트(?)를 벌여서, 동북삼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자국민 보호라는 카드를 내밀어 점령하는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봉천을 지키고 있던 유상청과 봉천 독군서 참모장 장식의의 침착한 대응으로 인해 이런 시나리오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들은 64일 황고둔 역에서 목에 큰 상처를 입은 장작림을 재빨리 원수부로 옮겼고, 9시에 사망한 그의 상황을 일체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당시 주치의였던 영국의사에게 인정으로 호소했고, 다섯째 부인 역시 염탐하러온 일본 영사관 부인 앞에서 화려한 화장을 하고 웃고 떠들면서 연기를 했다. 덕분에 일본 관도군은 장작림의 생사를 알지 못해 다음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또한 장작림에 의해 열심히 후계자 수업을 받은 장학량에게 급히 전보를 띄워 원수부로 오게 했다. 장학량은 아버지의 암살기도 소식을 듣고는, 병사로 위장해서 동북삼성으로 돌아왔고, 병권을 위임받아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었다. 장작상을 비롯한 아버지대의 구파들의 신임과 장학량의 실력과 인품을 오랫동안 지켜온 신파들이 모두 합세해서 그의 취임을 환영했다.

 

일본 관동군은 자신들의 의도와 달리 장작림 암살을 단행했다는 증거들이 속속 밝혀지고, 동북삼성의 주인이 장작림에게서 장학량에게 혼란 없이 공고하게 이어지자 분을 참으며 3년이나 더 기다려야만 했다.

 

장학량은 1928619일 봉천 독군서에 취임하고, 621일 정식으로 아버지 장작림의 서거를 발표하고 49일 동안 발상기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 장작림이 죽은 지 16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참고: <만주군벌 장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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