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원세개, 조선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다!

朱雀 2011. 3. 2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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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원세개. 그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두 번 정도 등장한다. 한번은 임오군란때 들어와서 사사건건 간섭을 한 것이요, 두 번째는 중화민국 건국시 총통이 되었다가 결국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과한 욕심을 부린 것이다. 결국 일본에겐 21개조 요구를 받고, 중국인들에겐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용납을 받지 못해, 울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원세개는 위안스카이라는 중국식 발음 때문에 만주족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의 가문은 청나라에 충성한 한족이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이후 청나라의 권력의 핵심엔 증국번과 이홍장이 있었는데, 이홍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훗날 북양대신을 거쳐 흠차대신까지 승승장구하였다. 이홍장에 의해 창설된 북양군은 원세개의 의해 보다 현대화-제도화 되었으며, 훗날 원세개의 정치적 자산이 되고, 이는 다시 직계와 봉계로 나눠지는 북양군벌의 밑거름이 된다.

 

! 그럼 이제 우리 역사와도 빼놓을 수 없는 원세개에 대해 알아보자! 원세개는 1859916일 원보중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원씨가문은 항성에서 명문가로 손꼽히고 있었다. 원세개의 아버지 원보중은 친동생인 원보경이 아들이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원세개를 양자로 준다. 원보중은 이를 매우 기뻐하며 열심히 아이를 키우는데, 어릴 때부터 친어머니 유씨는 물론이요 유모 우씨의 젖까지 먹을 정도로 식탐이 남달랐다.

 

원보중은 원세개를 위해 비싼 수업료를 치르며 제일 유명한 선생을 붙여줬지만, 그는 도통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대신 말타기를 좋아하고, 무예를 열심히 익히는 등, 훗날 군벌의 효시로서 그 싹을 일찌감치 내비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원세개는 과거시험에서 두 차례나 낙방했다. 재밌게도 그가 조선에 들어왔을 때, 그는 정식관리로 임용돼서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원세개는 이전에 이홍장의 신임을 얻고 있던 원보령에게 부탁해서 영무처의 일을 보게 되었다.

 

원세개는 천성이 노는 것을 좋아하고 오만했으나, 당시엔 벼슬을 하기 위해 스스로를 엄히 단속하고 모든 일을 법대로 시행했다. 하여 군대내에서 엄중한 기율을 세우고, 당시 부정부패로 얼룩진 상황에서도 소신을 굳히지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은 당연히 윗상관들의 눈에 이쁘게 비칠 수 밖에 없었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조정은 오장경에게 6개의 부대를 이끌고 출병할 것을 명령했고, 원세개는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 청은 임오군란의 수괴로 흥선대원군을 생각했다, 하여 그를 납치해서 보정에 연금함으로써 상황을 종결지었다. 원세개는 이 작전과 잔당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여해 활약을 펼쳤다.

 

오장경은 원세개를 더욱 높이 평가해서, 당시 북양대신이었던 이홍장에게 상소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물 넷의 원세개는 동지라는 벼슬에 오르면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관료가 되었다.

 

18844월 오장경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원세개는 주둔군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위치에 있게 된다. 1884124, 김옥균이 중심이 된 개화파가 고종을 납치한 이른바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원세개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당시 고종이 있다고 알려진 우정국으로 향했으나 고종을 발견할 수 없었다. 당시 상황은 혼란스러워서 다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세개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고종을 되찾아오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청의 다른 관리들은 본국의 명령을 기다리자고 했으나, 원세개는 그렇게 했다간 너무 늦는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군대를 이끌고 왕궁으로 난입했다. 일본군과 하루가 넘는 교전 끝에, 고종을 구출해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냈다.

 

갑신정면의 활약으로 원세개는 이홍장에게 눈도장을 찍히고 말았다. 18853월 일본은 이토 히로부미가 대표로 나와 이홍장과 천진조약을 맺는데, 내용은 동시에 조선에서 군사를 철수하고, 파병하게 될 경우엔 서로 각서를 제출하고 일이 평정되면 곧바로 철군한다는 식이었다.

 

협상 기간동안 이토 히로부미는 원세개의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홍장은 당연히 들어주지 않았다. 당시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가까이 지내며, 군사고문을 요청하려 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원세개는 즉시 이홍장에게 대원군을 귀국시켜줄 것을 요청했고, 이홍장은 명성황후 일파를 견제하기 위해 대원군을 서둘러 귀국시켰다.

 

명성황후 측은 대원군이 귀국하자, 그의 노비 셋을 죽이고 함께 온 일행을 체포하는 등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커졌다. 이에 원세개는 중재자로 나서서 최선을 다했다. 비록 해결하지 못했지만 이런 일련의 일처리는 다시 한번 이홍장의 신임을 한층 두텁게 만들었다.

 

이후 원세개는 1894718일 돌아갈 때까지 무려 10년간 조선에 있으면서, 사사건건 고종의 업무에 참견하고 나섰다. 이는 몇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우선 청나라는 당시 신하국인 조선의 일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 1842년 난징조약 이후, 중국이 서구열강의 먹이감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조선에 있어서는 열강으로 행사했던 것이다.

 

이는 황제국으로서 위엄과 체통을 지키는 동시에, 열강으로 일어선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하도록 예방조치를 취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청조정은 조선이 식민지화될 경우, 만주땅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 보았다. 또한 누구든 조선을 차지하면 이를 발판으로 결국 중국 본토까지 진출할 것이라 예상했기에 어떤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조선을 사수하려 들었다.

 

-실제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이후, 만주로 진출하더니,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결국엔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게 됨으로서, 이런 염려는 현실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청조정은 당시 열강들의 비위를 거스리지 않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아직 청나라의 무기와 국력은 세계열강들과 비교해서 너무나 뒤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원세개는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일을 착실히 진행해나갔다. 그는 고종에게 상국의 관리로서 다른 나라와 외교하기에 앞서 알리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고, 다른 나라의 외교관들에게도 자신은 청국 관리로서 한 단계 높다는 식의 행동을 해서 고종과 다른 대사관들의 미움을 한꺼번에 샀다. 일본을 비롯한 몇몇 대사는 이홍장에게 직접 항의했지만, 그의 기개를 높이 산 이홍장은 이를 묵살했다.

 

아울러 원세개는 당시 독자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던 고종의 노력을 모조리 훼방놓았고, 사사건건 내정에 간섭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돈이 없던 고종에게 낮은 이자의 돈을 빌려주는 등의 세밀한 공작을 진행해서 자신을 무시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물론 원세개의 조선에서의 활동이 쉬웠던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 조선은 서구 열강들이 침을 실리던 먹이감이었고, 혼란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천둥벌거숭이라 잘 몰랐던 원세개는 이곳에서 안개 속 혼전을 벌이면서, 정치가로서 조금씩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원세개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본국으로의 송환을 바랬다.

 

허나 이홍장은 원세개를 본국으로 불러들일 수가 없었다. 우선 조선의 앞날이 너무나 불투명해서, 누구보다 조선의 사정을 잘 이해하고 처리할 관리가 필요한데, 그가 보기엔 원세개만한 적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원세개는 비록 오만하고 방자했으나, 시대를 어느 정도 읽을 줄 아는 눈이 있었다. 그는 청일전쟁(1894)이 터지기 직전에 병을 핑계로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며, 훗날 이홍장이 청일전쟁 때문에 다시 관리로 재임용하자, 갖은 핑계를 대고 적당히 처신했다. 결국 이홍장은 1895417일 이토 히로부미와 굴욕적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잃고, 2억냥의 엄청난 배상금을 물리게 된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이홍장은 국내에서 엄청난 비난을 샀고, 결국 북양대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당시 원세개는 이홍장을 직접 찾아가서 위로했다. 이런 대목에서 그가 얼마나 권력과 친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다. 원세개는 조선에서 활약할 때, 조선과 서구 열강 대사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았다. 심지어 그가 본국으로 송환될 때는 암살하려 든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가 상관과 권력자들에게 예쁨을 받은 것은 그가 얼마나 정치적인 처신을 잘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참고: <원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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