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배신으로 청조정의 1인자가 되는 원세개

朱雀 2011. 3. 30.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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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1895년 원세개는 하남을 관장하는 순무에게서 전보를 받는다. 바로 광서제를 알현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조정은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로, 군을 새롭게 개혁해한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광서제는 당시 유능한 신하들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는데, 권력에 항상 줄을 대고 뇌물을 바치고 아부를 일삼던 원세개가 유능한 신하라는 일부의 주장 덕분에 만나게 된 것이었다.

 

누구보다 서구열강들의 신식군대의 위력을 가장 가까이서 체험한 원세개는 군의 개혁을 소리 높여 주장했고, 광서제는 그를 높이 평가해서 군기처에 장경으로 임명했다. 장경의 일이란 고문정도로 그저 2-3일에 한번 정도 군기처에 나가면 되는 한가한 직책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권력지향적인 원세개는 이런 직책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군기대신 옹동화, 이홍조, 병부상서 영록 등에게 뻔질나게 찾아다니며 아부하고 뇌물을 바쳤다.

 

그런 노력은 결실을 맺어 영록 등의 추천으로 마침내 126일 정무군을 맡게 된다. 원래 그는 45백명의 군사를 모집할 수 있었는데, 이를 7천명으로 늘렸다. 독일의 군대를 본받아 보병-기마병-포병-공병-군수 등의 다섯 병과로 나누고, 서양식 훈련을 받고 신식 무기를 최대한 들여왔다.

 

원세개는 출세를 위해 권력에 아부했지만, 결코 무능력한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그는 군사적인 부분에선 특출난 재능을 보였는데, 당시 부정부패가 판치던 조정에선 병사들은 급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원세개는 직접 병사들의 급료를 챙겨, 자신의 휘하에선 단 한명이라도 급료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처했다. 아울러 군율을 높이 세우고 이를 잘 지키는 병사는 포상하고 승진시켰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즉시 파직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아울러 부하들의 충심을 사기 위해, 그들 각자의 고충을 헤아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는 최선을 다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덕분에 병사들은 사실상 황제의 군대가 아니라 원세개에게만 충성하는 사병이 되어버렸다.

 

당시 강유위와 양계초 같은 인물은 변법운동을 통해, 중국을 변화시키려 했다. 이전의 서구의 과학과 기술만 들여오려 했던 양무운동으론, 청일전쟁에서 드러났듯이 열강을 이길 수 없자, 이젠 그들의 제도와 문화를 들여오자는 식으로 변화한 것이었다.

 

당시 원세개는 영록왕에게 줄을 대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따지자면 수구파에 속했다. 그러나 광서제가 개혁파를 중시하는 것을 보고는 강유위 등에게 잘 보이고자 애썼다. 그러면서도 영록이 자신을 고깝게 보지 않도록 매우 처신에 신경썼다. 이게 말이 쉽지, 당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조정에서 양쪽 모두에게 미움을 사지 않고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던 원세개의 노력은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어려운 임무를 완수(?)함으로써, 양쪽 모두에게 환심을 사게 된다.

 

당시 광서제는 말이 좋아 황제지, 실권은 서태후가 모두 쥐고 있었다. 젊은 군주인 광서제는 변법을 시행해, 다시금 청황조를 부활시키려 했으나, 서태후는 이런 개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고민 끝에 광서제는 911일 교지를 내리고 시행에 들어갔지만, 서태후의 강력한 반발에 좌초하고 말았다.

 

강유위등의 개혁파는 마침내 서태후 일파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당시 막강한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원세개에게 손을 뻗는다. 원세개는 강유위에게 황제의 뜻을 따르겠다라고 말해놓고는, 서태후에게 모든 사실을 고해바쳤다.

 

당시 원세개는 광서제와 서태후를 놓고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광서제는 패기만만했지만 가진 권력이 보잘 것 없었고, 서태후가 사실상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서태후에게 붙는 것이 이익이라 판단한 원세개는 나름 도박을 실행했고, 이는 커다란 보답으로 돌아왔다.

 

921일 서태후는 섭정제도로 복귀를 선언했다 일련의 조치 광서제의 구금하고, 강유위의 체포명령을 내렸다. -이때 강유위는 일본으로 도망갔다- 925일 서태후는 원세개를 직례총독으로 임명했다. 이후 원세개는 사치스런 서태후에게 매번 엄청난 양의 자금을 바치면서 총애를 받기 시작한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를 이용해서 열강들을 몰아낼 생각을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열강들의 힘을 잘 아는 원세개는 이를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해서, 서태후가 621일 전쟁을 선포하자,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는 자신의 군을 철저하게 투입시키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해 8148국 연합군이 승승장구해서 북경에 오자, 서태후는 황태자를 데리고 서안으로 도망간다. 당시 원세개는 서태후의 요청을 받고도 군을 파견하진 않았으나, 피난중인 서태후에게 은 20만냥 이상을 보냈다. 이는 당시 관리 중에서 가장 많은 금액이자,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보낸 것이었다.

 

당시 비참한 도피생활 중이던 서태후는 이 일로 원세개의 충성심을 높이 샀고, 원세개는 서구 열강들에게 자신의 세력지인 산동이 당하지 않도록, 의화단을 섬멸하고 산동선이란 깃발을 내걸어 알렸다. 덕분에 8국 연합군은 원세개를 자신들에게 호의적인 세력으로 생각해서, 산동성이란 깃발만 보고도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정도였다.

 

이는 산동성인들의 호의를 샀고, 결과적으로 원세개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는 결과로 되돌아왔다. 원세개는 나름 적절한 조치로 서태후에게 능력있는 관리라는 프리미엄까지 얹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원세개는 자신의 지위를 지키면서, 열강의 침입도 막고, 군사력도 지키고, 출세길도 보장받는 ‘14의 결과를 챙기게 된다.

 

서태후는 이홍장을 내세워 1901926일 굴욕적인 북경의정서에 서명하고, 북경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해 117일 이홍장이 죽자, 그녀는 원세개에게 그 자리를 잇게 했다. 이후 원세개는 북양대신을 비롯한 8개 요직을 모두 차지하고, 북양군을 자신의 군대로 두며 사실상 청황조내에서 ‘1인자가 되어, 그의 인생 중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를 맞이하게 된다.

 

참고: <원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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