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손문과 신해혁명이 근대중국을 망쳤다?

朱雀 2011. 3. 3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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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과 중국에서 모두 국부로 추앙받는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최근 읽고 있는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에 재밌는 주장이 있어서 여기에 소개해볼까 한다. 1839-1842년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100년이 넘도록 암흑기를 지나왔다.

 

따라서 이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이 양이의 기술만 들여오자는 양이파와 기술뿐만 아니라 제도까지 들여오자는 변법파, 그리고 서양식으로 모든 것을 갈아엎자라는 혁명파로 나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흔히 우리는 당시 청나라가 부정부패했고, 과학기술이 서구에 비해 너무 뒤떨어져서 서구열강의 먹이감이 되고, 끝내는 일본에게 절반 이상 먹히는 수모를 겪었다가, 1949년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언하고 나서야 혼란기를 멈추게 되었다고 알고 있다.

 

!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주장이 하나 펼쳐진다. 바로 당시 청나라는 비록 부정부패했지만 과학기술과 사회 면에서 서양에게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청나라는 서구열강들과의 전쟁에서 연거푸 패한 것일까?

 

저자는 그 원인을 부패할 대로 부패한 청조정과 태평천국운동을 비롯한 민란에서 찾는다. 홍수전이 일으킨 태평천국운동은 1851년에 시작해서, 거의 청나라를 멸망시키기 직전까지 갔었다. 만약 홍수전이 남경함락에서 멈추지 않고 북경까지 진군했다면, 청의 멸망은 피할 길이 없었다1864년 증국번과 이홍장 등에 의해 평정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진압되고도 염군과 회족들이 5년 이상 반란을 일으키고, 1900년 의화단 운동까지 청조정은 정신이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제국 말기라 허약해진 상황에서 청나라는 왕국을 멸망시키려 하는 내부의 반란에 힘을 집중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외부의 적인 서구 열강들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결론이다. 실제로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날 당시는 태평천국운동이 진행하고 있었고,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최신식 무기와 훈련으로 단련된 일본군과 싸운 청군은 이홍장의 북양군 정도였다. 하여 일부 사가들은 사전(私戰)’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엔 도광제 시대부터 뿌리깊게 중국사회에 퍼진 아편과 서구 관리들에게 돈을 받고 나라의 이권을 파는 짓을 서슴지 않는 청조 관리 등의 관행까지 다채로운 이유들이 포진되어 있다. 심지어 당시 청조정의 권력을 장악한 서태후는 군자금을 이화원을 짓는데 도용할 정도였으니,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하겠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신해혁명과 손문에 대한 평가다! 손문은 홍수전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가 멸만흥한의 기치를 내걸은 점과 군국제를 폐지하기로 한 것등은 쌍둥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판박이라고 설명한다.-바로 삼민주의가 홍수전의 사상과 상당이 닮았다는 말이다-

 

1911년 무창봉기로 시작된 신해혁명은 기존의 청을 뒤엎고 공화정이란 새로운 질서를 내세우려 했다. 물론 그 의지 자체는 선하다고 할 수 있지만, 문제는 외부적인 요건이었다.

 

본래 중원은 광활한 만큼 통일이 되었다가 혼란기가 오고, 다시 통일되는 일이 늘상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번엔 서구열강들이 중국대륙의 이권을 차지하고, 땅을 차지해 식민지화했다는 데 있다. 만약 손문이 만주족의 청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입헌군주제라는 형식으로 허울뿐인 황권이라도 유지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비록 오래되긴 했지만, 청나라의 시스템은 훌륭히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인구의 약 92%)를 다스리기 위해, 청나라는 5부족(만주족, 한족, 몽골족, 장족, 회족)화합을 내세운 민족주의를 기치를 내걸었었다. 따라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했다면, 혼란을 최소화하고 나라의 역량을 모아 서구열강들과 맞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문을 필두로 한 혁명파들은 기존의 청황조를 없애고, 한족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꿈꿨다. 덕분에 만주족과 몽골족을 비롯한 기존의 세력들은 등한시되어, 각자의 세력권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가뜩이나 허약했던 중국은 더욱 허약해졌고, 중심을 잡아줄 곳(황제 혹은 정통성 있는 정부)이 없어서 불필요한 혼란기를 더욱 오래 가졌다는 게 글쓴이의 주장이다.

 

처음에는 이야기를 듣고, 반박할 구실을 생각해 보았으나, 조금 고심해보니 19506.25 전쟁 당시 중공군은 미군에 맞서서 압록강에서 38선까지 밀어냈던 대목이 떠올랐다. 당시 미국의 국력을 생각한다면, 이는 중공군이 이겼다고 봐도 될 지경이다. 그런데 무기와 병참등에서 중공군은 미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사령관인 펑더화이는 약 미군 1: 중공군 2 의 비율로 맞춰 인해전술을 구사하고, 미군의 움직임을 철저하게 파악해서 부족한 화력과 공군의 지원이 없는 약점을 커버했다. 심지어 유능한 리지웨이가 유엔 사령관으로 부임하자, 땅굴작전을 전개해서 애를 먹였다.-결과적으로 중공군과 미군은 38선을 긋고 휴전을 했으니 무승부를 이룬 셈이지만, 따지고보면 중공군이 이겼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당시 중공군이 미군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이란 지리적 특성을 최대한 이용하고, 당시 중국은 마오쩌둥 아래 강력하게 집결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력과 병참이 뒤떨어짐에도 놀라운 전과를 이뤄낸 것이었다.


청나라를 뒤엎고 황제를 없앤 손문과 혁명파의 의도 자체는 했을지 모르나, 중국의 시대적 상황을 전혀 고려치 않은 지극히 이기적인 결정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겠다. 손문을 비롯한 혁명파가 아니었다면, 중국은 좀 더 빠른 시간 안에 혼란을 수습하고 강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참고: <인물로 보는 중국근대사> <콜디스트 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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