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결국 황제에 올라 파멸을 자초하는 원세개

朱雀 2011. 4. 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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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손문은 비록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지만, 견제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수도를 남경으로 정한 것이고, 참의원이 결정한 새로운 대총통은 남경에 와서 취임할 때 현 총통과 국무원들을 해임하는 것, 마지막은 중화민국임시약법은 참의원에서 제정한 것으로 대총통이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는 처음에는 기뻐했으나, 손문의 요구조건을 듣고는 곧 의미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세개의 세력권은 북경을 비롯한 북쪽지방이었다. 따라서 그가 손문의 홈그라운드인 남경으로 간다면, 그 위세는 초라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참의원들이 정한 임시약법에 따른 것은 총통이 생각보다 그다지 권한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는 손문에게 전문을 보내고 각국의 공사들을 만나 지지를 호소한다. 손문은 주장을 굳히지 않았고, 원세개 역시 국가와 민족을 내세우며 굳히지 않았다. 손문은 특사로 채원배 일행을 보냈고, 여론의 지지를 얻고 있는 손문일행을 보며 원세개는 고민에 빠진다.

 

그런데 하늘의 도움일까? 특사가 온지 3일째 되는 1912229일 때마침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원세개가 북경을 떠나면 변란이 일어날 것이란 예언이 들어맞으면서 손문과 참의원들은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하게 된다. 310일 원세개는 임시총통에 취임하고, 당소의를 비롯한 이들을 각부의 총장으로 삼는다. 동맹회 회원들에겐 한직을 주고, 자신의 심복들은 요직을 차지하는 식으로 잔꾀를 부렸다.

 

원세개는 막상 임시총통에 오르니 별로 권한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당소의와는 오랫동안 일을 함께 해서, 자신의 뜻대로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국무총리에 오른 당소의는 원세개의 뜻과 다르게 하루 빨리 중화민국을 반석위에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심지어 자신과 대립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당소의를 보면서 배신감을 느낀 원세개는 사사건건 방해했다. 당시는 내각초기라 재정 때문에 많은 자금이 필요했는데, 조달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당소의는 다른 열강들의 이자가 너무 비싸 벨기에서 차관을 들이기로 했는데, ---프의 4개국이 항의했다. 이를 기회삼아 원세개는 당소의를 괴롭혔고, 참다못한 당소의는 사직서만 쓰고 나가버렸다.

 

원세개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부총통 여원홍이 혁명당원인 장진무를 없애달라고 하자, 부하들을 시켜 죽인다음 여원홍에게 뒤집어 씌웠다. 여론의 호된 질책과 남경에 내려갈 경우 손문 등의 문책이 두려워진 여원홍은 원세개의 뜻대로 조종될 수 밖에 없었다.

 

그뿐인가? 손문은 824일 직접 북경에 도착해서 13차례나 회담을 하지만, 원세개의 융숭한 대접과 현란한 말솜씨에 속아, 자신은 사회사업에만 종사하고 정계에 나서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하게 된다.

 

당시 국민당에선 송교인이 현란할 연설로 좌중을 압도하며, 손문을 이을 거목으로 지정받고 있었다. 총통 선거가 실시되면 자신이 질거라고 예감한 원세개는 1913320일 특별열차로 상해에 온 송교인을 부하를 시켜 암살하고 만다.

 

송교인의 암살로 국민당은 커다란 충격과 비탄에 휩싸인다. 손문은 상해로 가서 황흥등과 대책을 논의하지만, 당시 군사력을 동원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점차 원세개가 송교인을 암살했다는 증거들이 하나하나 포착되기 시작했다.

 

여론의 질책과 국민당의 반발이 표면화 되었지만 원세개는 요동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요지에 배치시키고, 국민당의 주요인물들을 내각에서 사퇴시켰다. 결국 참다못한 손문은 ‘2차 혁명712일 일으키게 된다.

 

그러나 준비부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요건 때문에 혁명군은 북양군에게 단 두달만에 참패를 맛보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무서워질게 없는 원세개는 거침없이 내달았다. 대총통이 되기로 한 원세개는 아직 헌법이 없는데도, 교묘하게 참의원들을 닦달해서 106일 국회에서 총통 선거를 실시하고, 세 번에 걸친 재선거에 걸쳐 마침내 1010일 정식 대총통이 되었다.

 

무창봉기가 일어나기도 한 이 날은 중화민국의 국경일이 되었고, 19134월 미국과 페루, 브라질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각국의 승인을 받기 시작했다. 대총통에 오르긴 했지만, 원세개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원래 미신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우연히 한 점쟁이에게서 황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그는 몹시 좋아하며 큰 상금을 내린 적이 있었다. 그의 아들 원극정은 황태자가 되어 후일 황제가 되고 싶어하는 망상 때문에, 조상의 묘에 예언적 물건들을 파묻고 마치 찾은 척하며 원세개 앞에서 연극했다. 이는 원세개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1914년 원세개가 군주제를 한참 고민 중일 때, 일본은 그에게 ‘21개조 요구를 해왔다. 당시엔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중국에서 유럽세력이 공백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이를 이용해서 824일 선전포고를 하고 청도를 공격해서 점령하고 말았다.

 

1915년 북경 주재 일본 공사 히오키마스는 원세개를 만나 ‘21개조를 요구하고, 만약 승인하면 원세개를 지지하겠다는 언질을 한다. 원세개다 ‘21개조를 보니 중국의 주권을 모두 침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지가 필요했던 원세개는 제일 심한 요구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받아들인다. 이로 인해 원세개는 일본이 자신이 황제가 되어도 지지할 것이란 망상에 빠진다.

 

이런 협상 과정은 뜻하지 않게 대중들에게 알려졌고, 중국인들은 대대적인 시위와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며 결사반대를 외쳐,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는데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게 했다.

 

원세개는 자신의 부하들은 물론 유력 정치인을 세심하게 섭외해서 군주제에 대한 의견을 타전하는 한편, 814주안회선언이 이루어 지게끔 유도했다. 양도를 비롯해 손옥균, 호영 등이 함께 한 이 선언의 골자는 군주제는 공화정보다 우수하고, 중국은 군주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식이었다. 이를 근거로 원세개는 군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연하지만 이런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모든 중국인들은 반대했다. 장건은 원세개에게 워싱턴이 되라고 충고했고, 양계초 역시 <이상하도다, 국체 문제여>라는 글을 지어서 철저하게 반박했다. 그러나 권력욕에 눈이 먼 원세개에겐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그는 부하들을 동원해서 각종 정치단체를 만들고 이를 통해 국민대표회의란 기구를 만들더니, 이윽고 자신의 황제추대를 밀고 나간다.

 

그러나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우선 일보을 시작으로 영국-러시아 공사가 반대를 했고, 심지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원세개가 사람을 보내 아무리 설득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일본에 피신해있던 손문은 1915년 중화혁명군을 조직해서 상해를 점령하며 진격을 시작했다. 이런 불안한 조짐이 있음에도 원세개는 황제취임식을 강행했고, 1213일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향시에도 두 번이라 떨어진 사내가 중국의 황제까지 오른 것이다.

 

국호를 중화제국이라 칭하고, 연호를 홍헌이라 한 원세개는 그러나 외교 문서들이 모두 되돌려오는 상황을 맞이했다. 해서 할 수 없이 공문서에서 연호를 빼고 총통의 신분으로 외교를 하고 말았다. 덕분에 원세개는 총통이면서 황제이고, 동시에 황제도 총통도 아닌 요상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중국인들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가 믿었던 북양군은 손문의 중화혁명군에게 번번히 패하고, 일본을 비롯한 열강들은 그를 지지해주지 않는 상황 등은 점차 그를 위기의식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마침내 원세개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191641일 평화회담을 제의한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황제에선 내려와도 총통직을 유지하고 싶어했던 원세개의 욕망은 당시 국민당은 물론이요, 중국인들의 반발을 샀다. 그러나 원세개는 이런 상황을 혼자만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심복인 진숙번, 탕향명 마저 차례차례 독립을 선언하자 화병이 터져 자리에 눕더니, 66일 새벽에 임종하고 말았다.

 

원세개는 청황조가 멸명하고, 중화민국이 건국되는 시기에 적절히 활약해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모두 국부로 모시는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었다. 만약 그가 권력욕을 부리지 않고, 총통직을 잘 수행했다면 오늘날 중국은 중화민국이 다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야욕을 위해 시대를 역행한 군주제를 시행했고, 열강과 국민의 비웃음과 손가락질 속에서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북양군이란 유산은 훗날 직계와 봉계로 이어지며 오랫동안 중국이 분열되는 큰 자산이 된다. 손문을 이어 남경정부의 총통이 되는 장개석이 북벌이 완성될때까지 북부지방은 혼란한 채로 남아있어야 했다.

 

 

참고; <원세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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