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중국 근대화의 시조, 임칙서

朱雀 2011. 4. 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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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관료 최초의 흠차대신 임칙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임칙서라고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 역사에 대해 조금 아는 이라면 아편전쟁을 떠올릴 것이고, 좀 더 아는 이라면 그가 <해국도지> 편찬에 일조해서 훗날 한중일의 개화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까지 알 것이다.

 

그럼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보자! 임칙서는 시골 훈장의 아들로 태어나 군사를 이끌 수 있는 흠차대신에 오른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청나라에선 임칙서 이전까지, 한인 관료가 문관이 되어도 군사를 이끌 수 있는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멸만흥한의 기치를 남몰래 항상 지니고 있는 한족을 청조정에서 못미더워한 까닭이다.

 

이는 거꾸로 이야기하면, 청조정이 한인관료를 우대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임칙서는 4세때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27세에 회시에 합격한 수재중의 수재였다. 조선처럼 세 번의 시험을 보는 청의 과거제도는 너무나 어려워서, 변법운동을 주도한 강유위는 떨어지기를 밥먹듯이 했고, 손문은 아예 포기하고 외국에 가서 공부할 정도였다.

 

임칙서가 관료로서 활동할 시기의 청황제는 도광제였다. 그는 유학에 심취한 지극히 유교군주였다. 그러나 당시 청나라는 건륭제 이후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항상 외국과의 교역은 관료가 직접 외국인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콩홍이란 상인을 내세워서 관리하는 식이었다. 이는 조공을 받는 천자국으로서 청나라의 자존심이자 오랑캐를 상대하는 방식이었고,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들은 이런 방식에 불만이 많았다.

 

게다가 중국의 값비싼 보물들. 그중에서도 차는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 널리 알려져 상류층에선 차없는 생활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당연히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다른 식민지에서 들어온 은이 모조리 청나라로 빨려들어가는 무역의 블랙홀수준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당시 청나라에 만연해있던 아편에 착안하게 된다.

 

아편은 원래 중국에선 고위층에서 피우던 것이었다. 원래 아편을 피우기 위해선 복잡한 과정과 이를 시중해줘야 할 하인이 필요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런 사치성 문화는 점차 백성들에게까지 내려갔고, 점차 편리한 방법이 고안되었다. 영국은 인도 등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아편을 수입해서 이를 중국에 넘기는 방식으로 막대한 이익을 보았고, 적자를 마침내 흑자로 변환시켰다.

 

당시 청나라 조정은 아편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도광제는 군주로서 당연히 이 일을 풀고 싶어했으나, 당시 청나라는 만성적인 부정부패에 시달리고 있었다. 영국상인들이 청나라 관료들이 아편판매에 앞장선다라고 말할 정도로, 뒷돈을 받고 아편을 팔아치울 정도였다.

 

도광제가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한 데는, 그가 호광총독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였기 때문이다. 임칙서는 다른 관료들과 달리 단순히 아편을 소각하고, 관련자를 엄히 처벌만 하지 않았다. 그는 아편중독을 4기로 나눠 격리 및 치료하고, 아편을 제조 및 판매하는 이들은 엄히 단속했다. 그 덕분에 1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그가 다스리는 지역에선 아편중독자가 급속히 줄고, 아편을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1839125일 광주에 도착한 임칙서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관련자 60여명을 체포하고, 콩홍을 통해 외국상인들에게 엄히 경고했다. ‘앞으로 영원히 아편을 들여오지 않겠다고 약속을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모두 처형하겠다. 그러면서 가지고 있는 아편을 모두 바칠 것을 명했다.

 

이전까지 말뿐인 청국 관리들의 모습을 많이 봐온지라, 영국상인과 대사는 일단 사태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임칙서는 달랐다. 당시 영국무역감독관인 앨리엇은 임칙서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영국인이 거주하는 주변을 봉쇄하고, 물자조달을 막았기 때문이다.

 

당시 압수된 아편은 2만 상자로 약 1,400톤 규모였다. 아편에 대해 잘 아는 임칙서는 이를 불에 소각하지 않고, 소금과 석회를 이용해서 처리했다. 불에 태우면 약 20-30%정도 회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영국인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영국군함 두 척이 광주에 입항하려고 시위했고, 그 과정에서 청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함이 물러났지만, 청군 함섬이 무려 26척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피해를 입고 말았다. 엄밀하게 따지면 무승부에 가까웠지만, 임칙서는 이를 조정에 승리에 보고했고, 도광제는 쾌재를 부르며 더욱 양이를 멸시했다.

 

이런 사실이 영국에 알려지자, 국회에선 법을 바꿔가면서 청국과의 전쟁을 승인한다. 보수당의 글래드스턴을 비롯한 의식 있는 몇몇 이들은 명분도 없는 더러운 전쟁이라며 반발했지만, 당시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19395월말 주산열도를 시작으로, 영국군은 부패하고 방비는 물론이요,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는 청국군을 상대로 연승행진을 계속했다. 임칙서는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탄핵되었고, 새로 흠차대신에 임명한 기선이 조약을 맺고자 했으나, 영국과 주산열도를 요구하는 영국의 제안에 도광제가 대로해서 결렬되고 만다. 당연히 전쟁은 계속되었고, 1842829일 불평등한 남경조약을 맺으면서 굴욕의 100년사가 시작되었다.

 

청국은 여태까지 내세웠던 콩홍을 폐지하고, 관료들이 직접 외국인들을 상대하게 되었으며, 홍콩을 비롯한 조차지를 서구열강들에게 강압적으로 내놓게 되었다. 유교적인 선정을 베풀려 했던 도광제는 시대를 잘못 읽은 탓에, 굴욕의 역사를 시작하는 장본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임칙서는 신강성으로 유배를 떠나 힘든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그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세계지리와 번역했고 어렵게 모은 자료를 친구인 위원에게 넘겨 <해국도지>를 완성케 했다. 그의 사상은 이후 증국번-이홍장-강유위-양계초에게 이어져, 혼란기 청나라를 살리기 위한 부단한 노력으로 이어진다. 비록 임칙서는 시대적 한계는 있으나, 당시 서구 열강들의 문물을 배우려했고, 그의 노력은 후학들에게 이어졌다는 부분에서 이룩한 바가 크다 하겠다.

 

아울러 그는 1845년 유배에서 풀려나, 1849년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흠차대신으로 임명되나 임지로 가는 과정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의 못다한 임무는 증국번-이홍장-좌종당 등이 맡아서 하게 된다.

 

참고: <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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