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오성홍기에 영향을 끼친 양계초

朱雀 2011. 4. 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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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국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양계초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우리 역사를 보면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일이 있다. 중국 근대사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있다. 바로 무술변법이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 광서제가 적극 후원하고 강유위를 비롯하여 양계초를 비롯한 변법파가 참여했다는 것이다.

 

광서제는 말이 좋아 청나라의 황제였지, 서태후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28세의 성인이 된 황제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제국을 경영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서구열강들의 위력을 직접 확인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계속해서 맺고 있는 황제는 부국강병책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양계초의 스승인 강유위는 좋게 말해 대사상가지만, 부풀려진 경향이 크다. 이에 반해 제자인 양계초는 강유위보다 보다 넓게 보고, 보다 높은 안목을 지녔다. 말그대로 청출어람이라 할 만하다.

 

양계초는 강유위의 제자답게 입헌군주제를 지지했다. 그는 중국 최초의 논설위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당대의 명필가로 이름을 날렸다. 예를 들어 그는 손문과 서로 펜으로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했는데, 특히 손문의 한족만을 위한 소민족주의를 공격하고, 기존의 청나라의 대민족주의를 숭상했다.

 

손문 역시 명분이 딸리는 바람에 자신이 들어올린 팻말에는 대민족주의를 내세울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모택동 역시 오색홍기를 그릴 때, 양계초의 사상에 힘입어 한족-만주족-몽골족-장족-회족을 뜻하는 다섯 개의 별을 그려넣게 되었다.

 

오늘날 중화사상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이는 양계초가 논설위원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우리의 빛나는 중화사상은..’이라는 식의 문장을 쓰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따지면 고작 10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단어다.

 

오늘날 중국과 중국인의 사상에 양계초의 영향력은 몹시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진대로 양계초는 스승인 강유위와 함께 무술변법을 시행했지만, 서태후의 견제와 반발로 불과 100여일만에 실패하고 말았다. 원래 그는 중국에서 죽음으로서 자신의 사상을 세우려고 했으나, 함께 무술변법을 주도한 담사동이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일본으로 도피하고 만다. -담사동은 야채시장에서 효수를 당한다-

 

일본으로 건너온 양계초는 일본의 신문화를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단순히 변법을 통해서는 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신민론을 들고 나온다. 백성이 새로워지지 않고서는 결코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없다가 그 주장이라 하겠다.

 

19032월 양계초는 다시 미국행을 떠난다. 그는 미국에서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된다. ‘필설로 형용하지 못하겠다고 할 만큼 미국의 번영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양계초는 미국의 빛만 보진 않았다. 빈부격차를 비롯한 미국의 어둠 역시 똑똑히 보고, 중국은 입헌군주제만이 해답임을 재차 스스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선 손문과 양계초를 묶기 위한 일련의 시도가 벌어진다. 특히 이들을 후원한 일본인 이누카이 코와시의 중재로 그들은 이런저런 만남을 가진다. 그러나 양계초의 움직임을 염려한 강유위 때문에 이런 시도에는 제동이 걸리고, 강유위와 양계초가 보황회를 화교가 사는 지역마다 퍼트려, 손문의 혁명파에 경도된 사람들을 끌여온다. 이에 반발해서 손문은 강유위와 양계초를 상대로 공격적인 논쟁을 펼치게 된다.

 

양계초가 손문의 혁명사상에 반발한 것은 무엇보다 기존의 황실을 없애는 것에 있다. 양계초가 보기에 손문의 말대로 했다가는 중국에는 중심부가 사라져서 없어도 될 혼란기가 가중될 것이라 보았다. 중국 역사를 보았을 때, 중앙권력이 사라졌을 때 지방권력들이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일이 매번 반복되었다. 양계초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함으로써 혼란기를 최소한으로 부국강변으로 매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결과론적으로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약 40년의 혼란기를 거쳤으니, 그의 식견은 매우 탁월하다 하겠다.

 

광서 31820일 일본 유학생들이 뭉쳐 동맹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들은 손문의 삼민주의를 표방하고 나서 혁명파였다. 이들은 도쿄에서 기관지인 <민보>를 발행했는데, 이에 맞서 강유위는 12월에 뉴욕에서 <제국헌정회>를 내며 서로 불을 뿜는 논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특히 양계초는 논설위원으로서 손문이 중심이 된 동맹회 회원들의 필설에 혼자서 맞섰다. 양계초가 보기에 손문이 주장하는 평균지권(토지소유 균등화)’는 망상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인간의 사유제에 대한 욕심을 부정하는 처사였다. 역사가 말해주지만, 사유제가 보장되지 않으면 개인은 의욕을 잃고 경제활동에 매진하지 않는다. 이는 국가의 살림이 피폐해지는 악순환을 형성한다. 실제로 손문의 삼민주의에 영향을 받은 모택동이 4천만명이 넘는 아사자를 만들어낸 대약진운동을 통해 비싼 수업료를 치러야만 했다.

 

허나 안타깝게도 양계초의 주장은 당시 혁명파의 주장에 혹해있던 유학생들과 부패한 청조정에 실망한 백성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자금부족과 잇단 화재로 인해 <신민총보>등을 폐간할 수 밖에 없었다.



 

참고: <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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