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장개석과 모택동이 모두 존경하는 증국번

朱雀 2011. 4. 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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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운동과 염군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후진타오를 비롯한 중국의 최고위층이 존경하는 인물로는 흔히 강희제를 꼽는다. 그렇다면 현 중국 공산당의 영원한 주석이라 할 만한 모택동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은 누구일까? 바로 태평천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청나라 정계의 거목이 된 증국번이다. 근데 재밌는 점은 국민당을 이끌면서 그와 대결을 펼친 장개석 총통 역시 증국번을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가치관도 다르고 첨예하게 이해가 대립되는 두 사람이 근대격변기의 인물인 증국번을 존경하는 것일까? 태평천국운동은 한동안 중국 공산당에선 위대한 농민운동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고 청나라 조정을 대표한 증국번과 이홍장등은 반대급부로 비판을 받는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 증국번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바뀌었다.

 

왜 그런 결과가 벌어졌을까? ! 증국번에 대해 좀 더 심도있게 알아보자! 증국번은 지극히 평범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증린서는 관원이 되기 위해 과거를 봤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증국번은 28세인 도광 18(1838)에 회시에 합격함으로써 아버지의 염원을 이루어진 효자가 되었다.

 

증국번이 관료가 되어 활약을 할 때는 제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날 무렵이었다. 아편전쟁의 패배이후에도 청조정은 그다지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증국번은 달랐다. 그는 상소문을 올려 아편전쟁 후에 생긴 민생피폐의 원인을 지적했다.

 

이를 정리하면 ‘1. 은값이 너무 올라 동전으로 내는 세금이 올라가 백성들이 이를 감당하지 못해 유민이 늘어난다 2. 도둑이 크게 늘어나고 치안이 불안해져 백성이 생업에 종사하지 못한다 3. 도둑이 많아지니 당국은 엄벌위주로 나가고, 이 과정에서 억울한 백성이 생겨나니 갈수록 정부를 불신한다이다. 상소를 통해 증국번은 모반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고 읍소한 것이었다.

 

본래 실용적인 공양학에 매진하던 증국번은 이를 계기로 보다 학문의 폭을 넓히기 위해 애썼다. 그런 그의 풍모는 전국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이홍장과 좌종당 같은 이들이 제자가 되기를 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도광제가 떠나고 함풍제가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났다. 청조정은 처음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삼하 이를 진압하려 했으나, 그가 가는 도중 사망해서 이성원을 대신 흠차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1만여명의 군을 이끌고 가서도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태평천국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아편전쟁이후 배상금을 무는 과정에서 청조정이 어쩔 수 없이 백성들에게 높은 세금을 징수했고, 이는 가뜩이나 피폐한 백성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다. 이때 홍수전은 자신이 구상하는 천국을 들고 나와 백성들을 현혹시켜 난을 일으켰다.

 

당시 청나라 군대의 기율과 기강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관원들은 병사들의 급료마저 횡령하기 일쑤였고, 군대의 무기는 녹슬고 군량미는 남아있질 않았다. 증국번은 이런 상황을 상소문으로 써서 올리며 직접 간했고, 이는 정치적 위기를 자초했다. 연거푸 반복되는 상소해 노한 함풍제가 그를 제거하려 했으나, 주변 신하들의 만류로 간신히 증국번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함풍제가 그의 충심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증국번 역시 (정치인은) 좀더 유연하게 행동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당시 멸만흥한의 기치를 든 태평천국운동의 구호는 점점 더 자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함풍 2(1852) 모친의 부음으로 인해 상중이던 증국번은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고민했고, 사상 최초의 직업적인 의용군을 성단위로 조직할 생각에 미친다. 이는 상군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상군은 우선 신사(사대부)층이 주도한 까닭에 재정적인 여유가 있었고, 당시의 부패한 관군과 연관되지 않은 까닭에 독립적인 지위 체계를 갖출 수가 있었다. 더불어 대포를 장착한 함선과 수군을 집중해서 키운 덕분에 화력면에서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런 이유로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다.

 

당시 태평천국운동은 청조정의 예상을 깨고 엄청난 진군속도를 보이고 있었다. 심지어 함풍제는 수도인 북경에서 떠날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마침내 함풍 41854년 증국번은 3만여명의 상군과 120척의 함대를 이끌고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나섰다.

 

그는 정벌에 앞서 <토월비격>을 써서 청국인들을 열광시켰다. 그는 태평군을 월비로 낙인찍혀 고립시켰다. 땅은 하늘의 것이라 말해 태평천국측이 주장한 천조전무를 공격했다. ‘모든 땅을 골고루 나눠준다는 홍수전의 말은 일반백성은 열광했지만, 반대급부로 신사층의 격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아울러 공자를 부각시키고, 인륜을 높이 들어 기존 가치체계에 반하는 태평천국운동에 대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토월비격>의 그 효과면에서 <삼국지><출사표>를 능가한다고 하겠다!

 

이후 12년 동안 증국번은 제자인 이홍장과 좌종당 등과 더불어 태평천국운동을 토벌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매번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두 번이나 크게 패해서 가진 병사를 거의 다 잃기도 하고, 한번은 포위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제자인 좌종당과 이홍장과 전술적인 문제로 크게 다투기도 했다. 아울러 청조정은 그가 반란을 일으킬까봐 두려워서, 그의 행보를 방해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속에서 증국번은 크게 상심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나, 그때마다 번번이 일어났다. 아울러 이전까지 지도자와 달리 자신들의 제자들을 크게 후원해서 그들이 자신의 품에서 벗어나 청조정의 기둥이 되게끔 했다.

 

그는 1870년에 이르러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제자인 이홍장과 더불어 조정에 상소를 올려 매년 13-20세의 청소년을 30명씩 미국과 영국 등에 15년씩 유학보낼 것을 건의했다. 이는 당시 뛰어난 서양문물을 들여오기 위한 방편의 일환이었다. 즉 양무운동의 시작이었다.

 

증국번은 현대적인 무기공장을 세우고, 직접 관리를 할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그러나 1872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증국번이 임칙서와 가장 다른 점은. 임칙서는 중체서용을 간직하고 있었으나, 이를 펼쳐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증국번은 태평천국운동염군의 난등을 이홍장 등과 함께 진압하면서 조정과 백성들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유학생을 보내고, 현대적인 무기공장을 세우고, 상용등을 조직하며 무너져가는 청조정을 충심으로 보필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태평천국운동은 무려 14년간이나 걸쳐서 이루어졌으며, 전성기에는 남경을 정벌하고 북경까지 노리고 올 정도였다. 허약한 청나라는 멸망직전까지 갈 정도였다. 당연히 이를 진압한 증국번은 단숨에 모든 이들의 이목을 집중했고 그중 많은 이들이 황제에 오를 것을 권유할 정도였다.

 

사실 증국번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황제에 오를 파워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역천의 길을 택하지 않고, 충신의 길을 택했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백성과 나라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는 청나라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하여 자신의 제자인 이홍장과 좌종당을 키워 자신과 비슷한 반열에 오를 정도로 후견인 역할을 했다. 그가 키운 이홍장과 좌종당은 비록 의견은 달랐으나, 각기 무너져 가는 청나라를 멋지게 보필하는 나라의 기둥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아울러 이홍장으로 이어지는 북양군은 훗날 원세개가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의 초대총통도 부족해서 황제에 오르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장개석과 모택동이 증국번을 존경한 것은 무엇보다 시대를 탁월하게 읽어내고, 주변 인물들을 훌륭하게 다루는 그의 인품과 용인술 때문이었다. 작은 일 하나까지 일일이 챙겼던 제갈공명과 달리, 그는 자신이 못 하는 일 등은 자신이 믿는 이에게 과감하게 일임하고 그를 후원했다. 그런 식으로 키운 인재들은 모두 나라의 충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역시 그의 든든한 정치적 동지가 되어주었다.

 

증국번의 사상과 용인술은 오늘날 중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21세기 패권국이 되기 위해선 새로운 중체서용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울러 다변화하고 급작스럽게 변화하는 오늘날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선 각계각층의 인재들을 발굴해서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니 말이다.

 

참고: <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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