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21세기 초강대국?!

굴욕과 치욕을 견뎌낸 동양의 비스마르크, 이홍장

朱雀 2011. 4. 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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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 근대사를 보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 한명 있다. 바로 이홍장이다. 스승 증국번과 함께 홍수전의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고 화려하게 청조정에 등장한 그는 말 그대로 중국근대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일본과 맞서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 키운 북양군은 훗날 원세개에게 이어져, 그가 손문을 밀어내고 초대총통이 되는 정치적 밑거름이 된다. 젊은 손문은 북양대신인 이홍장에게 편지를 보냈고, 변법자강운동을 일으킨 강유위와 양계초는 그와 어느 정도 의견대립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호장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서태후를 비롯한 청조정의 뒷수습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서구열강들과 늘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거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조약을 체결한 것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항상 굴욕적일 수 밖에 없었다.

 

갑신정변이 청의 개입으로 실패한 후, 일본과 맺은 텐진조약,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굴욕적으로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 서태후가 의화단으로 서구열강들을 중국에서 몰아내려고 하다가 8개국 연합군이 베이징까지 점령하면서 역시 굴욕적으로 맺은 신축조약까지...

 

굵직굵직한 것들만 예를 들었지만 군대사의 청조정이 서구열강과 일본과 불평등조약을 맺을 때에 항상 이홍장이 있었다. 이홍장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한 청나라에 끝까지 충성을 바친 충신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열강들에게 많은 것을 양보할 수 없는 조약의 체결당사자로 나섰기에 그는 많은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해도 중국내부 평가에서도 그는 매국노급으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중국이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역사공정이 진행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 청나라는 혼란기였다. 그는 스승 증국번과 함께 무려 10년이 넘게 태평천국운동을 정벌함으로써 정계에 진출했고, 늘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보다 중국을 빠른 시일안에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그는 누구보다 서양문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당시 국제외교법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북양대신이 되어 수 많은 조약체결의 당사자로 나선 것은 그만한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서태후처럼 권력을 장악한 이는 물론이요, 당시 황제였던 광서제, 조정내 개혁파와 수구파와도 넓은 친분을 쌓고 있었다.

 

광서제는 변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홍장을 실각시킴으로써, 서태후를 차단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늘날 평가는 만약 서태후와 교감이 가능했던 이홍장을 끌어들였다면, 1898년 변법자강책이 그토록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가진 않았을 것이다. 일례로, 서태후는 그 이후에 -내외부적인 요건때문이긴 하지만- 입헌군주제를 비롯한 과감한 제도를 시행하려 했었다. 따라서 당시 서태후가 광서제의 변법자강에 반대한 것은, 내용보다는 그가 당시 취한 행동 때문에 반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홍장은 혼란기의 관료로서 군대를 양성하고, 서태후의 신임을 얻기 위해 주식을 비롯한 몇백만냥 수준의 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예로 들어, 그를 부패한 정치인으로 매도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당시 혼란기 중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누구나 많은 돈이 필요했다. 게다가 북양군을 비롯해서, 탐욕스런 서태후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이홍장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훗날 북양해군이 청일전쟁에서 참패한 것은, 당시 서태후가 군자금을 유용해 이화원을 짓는데 썼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태후에 대한 평가가 가혹하기도 하지만, 시대를 내다보는 눈이 없었던 서태후로선 그동안 관행처럼 묵인된 행동을 해왔다고도 볼 수 있겠다. 따라서 청일전쟁당시 북양해군의 함대는 낡고 포탄조차 제대로 없었으니,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이다-

 

조약을 맺는 자리에 나서는 그를 보며 주변인들이 만류했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을 가겠는가?’라며 분연히 치욕의 자리로 나선 그는 분명 대인배라 할 것이다. 비록 서구열강에게 자국의 영토를 넘겨주었지만, 그는 ‘99이란 단서조항을 찾아 훗날 중국이 마카오 등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당시 조약체결자들이 보기에 ‘99은 반영구적이었지만, 이홍장은 훗날 후손들이 이 치욕의 역사를 넘어서서 되찾아오리라 본 것이다. 가히 국가의 대신으로서 백년후를 내다본 참으로 현명한 행동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원세개를 조선에 보내 무려 10년간이나 내정간섭을 시킴으로서, 이홍장은 우리에겐 부정적인 인식을 남겼다. 그러나 이홍장은 당연히 청국인으로서 자신의 나라를 제일 먼저 생각했고, ‘이이제이전략의 일환으로 조선과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맺게끔 해서,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다. 물론 미국이 이 조약을 무시함으로써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지만.

 

이홍장. 그는 혼란기에 정계에 진출해 누구보다 당시 세상을 읽을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인물이었다. 만약 그가 좀 더 늦게 태어났다면 손문 등과 더불어 보다 자유롭고 강한 중국을 만들지 않았을까? 비록 혼란기에 태어나 굴욕과 수모의 현장에서 활약하고, 동시대인들에게 오해와 멸시를 받아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한 위대한 정치인이었다.

 

최근에 이르러서 중국이 이홍장을 객관적으로 재평가하면서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은, 이제 중국이 부강해지면서 굴욕의 100년사를 예전처럼 감정이 아니라 차가운 이성으로 판단하게 된 부분이라 하겠다. 역사공정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역사재평가 작업이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별다른 논의조차 없는 우리의 근대 100년사 역시 좀 더 활발한 논의와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같은 시기 굴욕의 역사를 지닌 우리가 옆나라 중국의 역사작업을 보며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아닐까 싶다.

 

참고: <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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