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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4

결국 황제에 올라 파멸을 자초하는 원세개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손문은 비록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했지만, 견제를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그래서 몇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하나는 임시정부의 수도를 남경으로 정한 것이고, 참의원이 결정한 새로운 대총통은 남경에 와서 취임할 때 현 총통과 국무원들을 해임하는 것, 마지막은 ‘중화민국임시약법’은 참의원에서 제정한 것으로 대총통이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는 처음에는 기뻐했으나, 손문의 요구조건을 듣고는 곧 의미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원세개의 세력권은 북경을 비롯한 북쪽지방이었다. 따라서 그가 손문의 홈그라운드인 남경으로 간다면, 그 위세는 초라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참의원들이 정한 임시약법에 따른 것은 총통이 생각보다 그다지 권한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원세개..

원세개는 어떻게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었는가?

중화민국의 초대 임시총통을 지낸 손문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개인적으로 중국근대사를 읽으면서 가장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바로 1911년 신해혁명이후 임시총통이 된 손문이 원세개에게 총통직을 양보한 일이었다. 간략하게 서술한 역사서에선 원세개는 단순히 ‘군벌’정도로 소개되어 있었기에, 그간의 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군사력이 남다른 것만 가지고는 아무리 허약한 중화민국 초기라해도, 민중의 엄청난 지지를 받는 손문을 밀어내고 총통이 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이후, 원세개는 심각한 착각을 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가 파멸을 자초했지만, 그럴 수 있을만큼 그의 권력은 막강했다. 그 안의 사정은 어때했던 것일까? 자! 이제 이야기를 신해혁명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909년 1월 6..

원세개, 조선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다!

원세개 - 이미지출처: 위키백과 원세개. 그는 우리 역사 교과서에 두 번 정도 등장한다. 한번은 임오군란때 들어와서 사사건건 간섭을 한 것이요, 두 번째는 중화민국 건국시 총통이 되었다가 결국 스스로 황제에 오르는 과한 욕심을 부린 것이다. 결국 일본에겐 21개조 요구를 받고, 중국인들에겐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용납을 받지 못해, 울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만다. 원세개는 ‘위안스카이’라는 중국식 발음 때문에 만주족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의 가문은 청나라에 충성한 한족이었다. 또한 ‘태평천국의 난’이후 청나라의 권력의 핵심엔 증국번과 이홍장이 있었는데, 이홍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훗날 북양대신을 거쳐 흠차대신까지 승승장구하였다. 이홍장에 의해 창설된 북양군은 원세개의 의해 보다 현대화-제도화 되었으며,..

장학량은 왜 장개석 총통을 감금했는가?

청년 시절의 장학량 -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역사는 때때로 한 사람에 의해 큰 흐름이 바뀔 때가 있다. 중국의 근대사는 여러 인물들로 인해 그 흐름이 크게 바뀌었지만, 그 중에서도 장개석과 모택동의 명운을 크게 바꾼 사건을 들라면 아마도 1936년 12월 12일 벌어진 ‘서안사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공산군 토벌을 격려차 온 장개석을 장학량이 섬서성에서 체포하여 감금한 사건으로 중국 전체를 들었다 논 일이었다. 이는 당시 장학량이 남경정부의 부사령관이며, 장개석의 부하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하극상’이란 초유의 사태다. 게다가 당시 장개석이 국민당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정을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야기는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이 폭사를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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