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왜 우리에겐 토론문화가 없을까?

朱雀 2010. 11. 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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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샐던의 <정의란 무엇인가?> 부록 DVD의 한 장면. 마이클 샐던 교수와 학생들이 ‘정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교수님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최근 재밌게 읽고 있는 마이클 샐던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부록 DVD를 보면, 실제 하버드대에서 마이클 샐던 교수와 하버드생간의 토론이 생생하게 담겨져 있다. 우리 생활에서 흔히 겪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를 매우 재밌게 이야기해주는 마이클 샐던의 모습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 더욱 인상 깊은 것은 자신의 생각을 유감없이 털어놓는 하버드생들의 모습이었다.

 

다양한 인종이 함께 수업을 듣는 그들은 마이클 샐던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유감없이 털어놓고, 때로는 마이클 샐던과 때로는 학생들끼리 토론을 벌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부럽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7세기 프랑스 사상가인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허나 우리는 어떤가? 대화를 하다가 조금이라도 밀린다 싶으면 <지붕 뚫고 하이킥>의 황정남이 임하셨는지 “됐고!”를 외치며, 다른 이의 말을 끊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기 일쑤다!

 

심지어 우리의 언어생활을 보면 ‘나는 당신과 생각이 틀리다’라는 말이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릅니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엄연히 다른 말이다. 왜 우리는 ‘다르다’ 대신 ‘틀리다’라는 말을 쓸까? 혹시 우린 다른 의견을 ‘틀린 것’으로 이미 간주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린 이의 의견을 묵살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상사라는 이유로 리더라는 이유로 남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주장만을 옳다고 내세우며 다른 이의 의견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치 <개콘>의 ‘두분토론’처럼 말이다. 이런 소통 부재의 문화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어떤 이는 그 기원을 조선시대에서 찾는다. 얼마 전 성황리에 종영한 <성균관 스캔들>의 등장인물 정약용이 말했지만,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이 그야말로 박 터지게 토론한 이야기”를 적어놓은 책이다.

 

우린 흔히 <논어>를 공자가 제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것으로 오해하지만, 실상은 공자와 제자들은 어지러운 춘추전국시대에 이상적인 정치가 무엇인지 실로 무서운 토론을 펼쳤다. <논어>는 이를 정리해서 담은 책이다!

 

그런 문화는 당연히 조선시대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대표적인 예가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7년간에 서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이어진 사단칠정론이다. 당시 퇴계 이황은 58세, 기대성은 겨우 32세였다. 언뜻 생각하면 나이도 많고 벼슬도 높은 이황이 이제 갓 벼슬길에 오른 기대성과 논쟁을 벌일 일은 없어 보이지만, 두 사람은 무려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토론을 벌였다.

 

문제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6.25 전쟁과 군사정권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상명하복’의 군대식 문화가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이상하게 유교문화의 본질은 사라지고 껍질만 남아, ‘권위주의’가 여기에 편승한다.

 

돌이켜보면 우린 대화하거나 토론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학교에서 친구사이에도 토론을 하는 경우는 일부 수업 뿐이다. 우린 누군가 우리와 의견이 다르면, 그 사람을 미워하기 일쑤다. 그리고 토론을 하면 자신이 ‘틀렸다’라는 느낌이 와도 끝까지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마치 ‘지면 끝’인 것처럼.

 

여기엔 ‘1등만이 전부를 차지하는’ 우리식 1등지상주의 주입식 교육도 한몫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네 학교는 1등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한다. 심지어 올림픽조차 금메달을 딴 선수만이 인정을 받는다. 은메달과 동메달은 마치 빛이 바란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최근엔 인식이 바뀌어서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역시 금메달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다.

 

앨빈 토플러가 그의 저서 <제 3의 물결>에서 제시한 ‘정보화 사회’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정보화 사회의 특징은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회에선 고객과의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물건을 생산해내야마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기업도 직장인도 오늘날처럼 변화하는 시기에 살아 남으려면 다른 이들과 끊임없는 소통은 필수조건이 되었다. 그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다른 이를 존중하고 끊임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우리는 보다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해준다. 대화와 토론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폭넓은 인식의 계기를 마련해주며,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

 

다행히 오늘날 우리 시대는 ‘100분 토론’이 인기를 끌고 있으며, 인문학 강좌가 열풍을 일으키면서 대화와 토론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허나 ‘두세대쯤 지나면 토론문화가 자리를 잡을 거야’라고 말하며 기약 없는 훗날을 이야기하기보다, 지금 여기서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 바로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고, 존중해주는 태도를 말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작은 발걸음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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