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신정과 구정의 유래를 아십니까?

朱雀 2011. 1. 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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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어린 시절, 설날은 행복한 날이었다. 오랜만에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윷놀이를 하며 웃고 떠들고, 떡국을 비롯한 맛난 명절음식을 먹고, 무엇보다 최고 이벤트인 ‘세뱃돈’을 두둑이 챙길 수 있는 날이니 말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역사를 배우면서 양력설인 1월 1일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세시풍속사전을 찾아보니, 1896년 도입되었고, 이는 단발령과 함께 시행되어서 ‘일본설’로 인식되었다. 그 이후 일제는 양력설만 쇠게 하기 위해, 양력설만 공휴일로 지정하고, 이중과세 논란 등을 일으켰단다.

 

양력설은 공식적으론 1991년까진 공식적인 설날의 지위를 누렸다. 여기까지 읽어도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근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일제의 의해 강제로 시행된 양력설이 계속 지켜졌다는 사실에서 더더욱 치밀어오르는 화를 달래기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고유의 설날인 음력 1월 1일은 어떨까? 안타깝지만 여기에도 우리 역사의 비극이 숨겨져 있다. 서기 648년 진덕여왕은 김춘추를 당나라로 보냈다. 이는 날로 심해져 가는 고구려-백제 연합군에 맞서 당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였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듯, 댓가가 뒤따랐다. 신라는 649년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고, 650년 독자적 연호 대신 당나라 고종의 연호인 영휘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당나라는 황제국을 표방했다. 이는 그 외의 나라는 ‘신하국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650년 전까지 우리 역사상 다른 나라의 연호를 쓴 적이 없다. 물론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 책력을 받아들여, (당의) 연호를 쓴 적이 있었지만 결국 연개소문 등에 의해 참살당하면서 폐지됐다. 이는 고구려인에겐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쿠테타를 일으킨 이유 중에 하나로 알려져 있다-

 

당시 천문을 보고 자신만의 책력을 쓰는 것은 오직 황제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나라는 신라가 독자적 연호를 쓰는 것을 ‘도전’으로 간주했고, 고구려-백제 연합군의 파상적인 공격 앞에서 절박했던 신라로선 굴욕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전까지 우리 민족은 나름의 역법을 통해 설날을 쇠었지만, 이 이후로 설날은 당나라식 역법에 근거해서 쇠게 되었다. 그리고 잘 아는 대로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 역사 전개에 대해선 다들 알거라 여겨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인 설날과 양력설엔 이렇게 아픈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각각 당나라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쇠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설날을 다시 바꾸자는 말은 아니다.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고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대신 우리의 지난 역사를 통해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우리가 왜 양력설과 음력설을 우리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쇠었는지, 그리고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우린 언젠가 제 3의 설날을 또다시 맞게 될지 모른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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