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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연극 <명퇴와 노가리>를 보기 위해 대학로로 나섰다. 그리고 <명퇴와 노가리>를 보는 내내 깊은 상념에 빠졌다. <명퇴와 노가리>는 제목을 보는 순간 알겠지만, 우리 시대의 명퇴자의 긴 하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명예퇴직한 나삼남씨는 오늘도 고달픈 하루살이 중이다. 그는 명퇴한 이래 안방에서 쫓겨나 소파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백수인 아들 방에서 자고자 기웃거렸으나 거부당했고, 졸업을 앞둔 딸방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집에서 잘 곳이 없어 소파에서 자는 노숙인 아닌 노숙인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나 그는 집안의 가훈인 가화만사성을 지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다. 그 사이 강도를 하러 온 같은 처지의 명퇴자와 친해지고, 못된 계획(?)을 짜는 아들의 감싸는 등. 비록 가장으로서 권위는 잃었지만 아버지의 도리를 잊지 않은 그의 행동과 마음씀씀이는 깊게 눈에 밟힌다.

 

<명퇴와 노가리>의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30년간 최선을 다해 일했지만 회사에서 명퇴당하고 집에서 파출부로 지내는 그의 삶은 마치 오늘날 대한민국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게다가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지 못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무시당하는 아들의 모습은 1백만이 넘는 오늘날 청년실업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내내 가슴이 무거웠다.

 

물론 작품은 무거운 내용을 심각하게 이끌고 가지 않는다. 최대한 경쾌하게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애쓰고, 배우들의 순간순간 재치있는 대사와 코믹한 행동은 여러 차례 관객에게 폭소를 던져준다.

 

그러나 <명퇴와 노가리>는 결말은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주인공 나삼남씨는 그나마 능력 있는 가장이었다. 비록 지금은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가 그를 무시하지만, 그녀가 증언할 정도로 그는 30년간 열심히 일해서 번듯한 집한칸을 마련한 모범적인 가장이다.

 

그뿐인가? 비록 아내에게 무시당하지만, 그 상황속에서도 다른 이를 배려하고, 백수인 아들과 졸업을 앞두고 고민중인 딸을 살뜰히 보살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든 모범적인 아버지다.

 

내가 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나를 무시하는 아내에게 화를 내거나 폭언을 내뿜었을 것이다. 또한 아들과 딸에게도 걸핏하면 화를 냈을지 모르겠다. 다소 부당하게 보일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그의 모습은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게다가...<명퇴와 노가리>의 결말은 결국 개인적인 차원에서 끝이 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백수인 아들은 아마 오늘도 백수로 지낼 것이다. 졸업을 앞둔 딸은 지금도 내일을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나마 가정에서 제 목소리를 조금 찾은 아버지는 조금 더 행복하게 가정을 이끌어나갈 희망이 보인다는 정도? 당연한 말이지만 작품에선 행복한 결말을 보여줄 수 없다.

 

줄줄이 백수만 있는 집안에서 천지개벽한 일이 벌어지기란 불가능하다. 나삼남씨는 운 좋게 강도를 잡아 용감한 시민상을 받을 뻔 하다가, 사실은 그가 잡은 이가 정신병자로 판명나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것처럼.

 




<명퇴와 노가리>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소시민이다. 거기에 권력자는 없다. 작품은 지극히 한가정에 맞춰 극을 진행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의미의 결말은 맺을 수가 없다. 오늘날 백수들이 넘쳐나는 것은 개개인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고용 없는 성장이 이어지고, 사회안전망인 복지가 거의 전무한 우리네 실정탓이다. 따라서 대기업이 고용을 촉진하고, 중소기업이 제몫을 찾아내고, 사회복지제도가 작동하는 상황이 도래하기 전까진 진정한 의미의 결말을 지을 수가 없다.

 

<명퇴와 노가리>의 한계는 거기에 있다. 위에서 지적한 대목은 누구나 알고 있는 부분이지만, 기존의 기득권층이 자신의 가진 것은 내놓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늘날 부의 불균형이 심각한 우리 상황에서 이런 상황을 바꿔놓기 위해선 거의 혁명에 가까운 법적-사회적 변화가 뒤따라야 한다.

 

그러나 <명퇴와 노가리>에선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이건 사회 개도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다소 코믹하지만 제대로 그려내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이 작품을 보고 오늘날 우리의 삶과 상황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연극을 보지 않더라도 이 포스팅으로 인해 단 명이라도 그런 생각을 좀 더 진지하게 된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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