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광개토태왕이 꿈꾼 고구려는 어떤 나라였을까?

朱雀 2011. 3. 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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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 그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지 않는가?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한 정복군주(아들인 장수왕도 있기에 정확히 말하자면 아니지만)로 민간에 기억되고 있는 광개토태왕은 분명 고구려를 최전성기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이름 그대로 91살까지 장수하면서, 더욱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얼핏 생각하기에는 광개토태왕이 꿈꾼 고구려는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 같은 대제국이었을 거라고 모두들 막연하게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랬을까? 문헌상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지만, 광개토태왕은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청나라 강희제와 맞먹을 정도로 현명하고 어질면서, 싸움에 나서서는 물러서지 않는 그야말로 문무를 겸비한 일대의 대영웅이라고 판단된다.

 

우리가 흔히 고구려하면 중국 역대왕조와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패권을 다툰 강대국이란 인상을 떠올리는 것과 달리, 광개토태왕 이전에는 숱한 비극이 많았다.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은 중원의 실력자로 떠오른 전연의 모용황과 대결을 벌였다가 패해서 모후와 왕비가 포로로 잡혔다. 그뿐인가? 아버지 미천왕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과 무려 5만명의 백성들이 사로잡혀가는 비극을 겪었다.

 

그것도 부족해서 고구려의 위세가 크게 줄었든 것을 보고, 백제의 근초고왕이 병사를 보내서 맞서 싸우다가, 백제의 태자 근구수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국원왕의 비극은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비극이지만, 나라 전체를 봐도 엄청난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고국원왕을 이어 고구려 17대 왕이 된 소수림왕의 작명이 불교식으로 된 것은 불교를 받아들여서 인데, 이는 그가 마음의 위안을 불교에서 얻기 위한 것에도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버지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인 백제가 3만 대군을 이끌고 375년 쳐들어왔을 때도 사력을 다해서 간신히 물리쳤지만, 378년 극심한 가뭄이 들고 거란의 침입으로 8개 부락이 빼앗기는 등의 불운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광개토태왕의 아버지 고국양왕 때도 비극은 계속됐다. 고구려를 괴롭혔던 연나라가 하필이면 무슨 악연인지 다시 부활해서 중원의 실력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385년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지역을 빼앗았고, 가뭄과 흉년이 세트로 찾아왔고, 틈만 보고 있던 백제가 다시금 침공해왔다.

 

391년 즉위한 광개토태왕의 고구려는 당시 그러한 상황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어린 시절 아버지 고군양왕에게서 <태왕사신기>에서 그러했듯이, 가문의 비극을 들으면서 성장했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백제의 칼에 흉악무도하게 죽고, 할머니와 백성들이 짐승처럼 끌려가는 상황 등을 전해 들으면서 어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오히려 두려워하면서 소심한 군주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16살의 어린 나이에 위태로운 나라의 군주가 된 그는 예상외였다! 이전까지 소국에 불과했던 고구려의 군주답지 않게 그는 과감한 행동력을 보여주었다.

 

392년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하더니, 관미성-수곡성을 차례로 점령. 결국엔 백제의 심장인 아리수 북쪽을 차지하고 아신왕에게 항복을 받아내기에 이른다. 이후로 광개토태왕은 숙적 후연과 처절한 전쟁을 진행하며 요동의 실력자로 거듭나고, 숙신과 동부여를 정복해서 땅을 넓히고, 신라를 침입한 왜를 소통해서 사실상의 속국으로 만들어버린다.

 

광개토태왕의 정복사를 듣고 있노라면, 그가 40살도 안 되는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난 사실을 새삼 분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가 만약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심지어 중원의 일부를 차지한 대제국을 세웠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까지 있다.

 

근데 과연 실제로 그랬을까? 필자가 최근에 읽은 <고구려, 전쟁의 나라>에선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광개토태왕이 꿈꾼 고구려는 강대국이 아니라 강소국이라고. 광개토태왕이 살았을 당시, 중국은 수십개의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개토태왕은 전쟁만 수행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숙적인 후연의 신하를 자청할 정도로 유연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가 신라를 침입한 왜군을 물리치고도, 신라를 차지하지 않은 것은 당시 신라는 작은 나라인데다 사실상 속국을 자청했음으로 무리한 정복사업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백제 역시 번영을 가져온 아리수(한강)을 빼앗음으로써 국운이 기울게 되었다. 따라서 무리하게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시간을 들이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고구려는 위쪽에선 끊임없이 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중원은 서서히 정리되어서 실력자로 북위가 떠오르고 있었다. 명분도 없고 국력이 약한 북연을 공격하고 지지한 것에 대해 <고구려, 전쟁의 나라>에선 완충지대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상당히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고구려가 시작된 땅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어서 수렵하는 지경이었다. 훗날 국토가 넓어지면서 사정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자연재해가 많았고, 수시로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서 백성이 풍요롭게 살기 어려웠다.

 

따라서 광개토태왕이 전쟁을 벌인 것은 일견 농사지은 땅을 얻기 위한 발로이기도 했지만, 마치 삼한통일의 신라가 그랬던 것처럼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전쟁의 귀재 광개토태왕이 만약 마음을 먹었다면,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북연을 정복해 한동안은 동북아의 강대국으로 우뚝 서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어서, 다른 중원대륙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나라들처럼 불과 몇십년도 못가서 쓰러졌을 것이다. <고구려, 전쟁의 나라>는 광개토태왕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만 정복사업을 벌이고, 나머지는 힘의 균형추를 맞추는 등의 일을 통해 백성이 고달프지 않게 살 수 있는 나라를 꿈꾼 군주로 묘사한다.

 

무엇보다 광개토태왕을 전쟁의 패배에 대해 항상 두려워 하는 군주로 그리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무적의 군대를 지닌 위대한 정복군주로 오인하기 쉽지만, 광개토태왕은 자신의 할아버지대부터 시작된 비극과 중원의 역사를 보며 배우고 느낀 것이 많았을 것이다.

 

게다가 누구 하나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고독한 군주의 자리에 앉아, 한번이라고 패배하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위태위태한 전쟁을 죽는 날까지 지속해야 했던 그는 충분히 인간적인 고뇌가 넘치지 않았을까?

 

싸움에 나서기만 하면 연전연승을 하고, 무적의 군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항상 중원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힘을 바탕으로 한 정밀한 외교를 펼쳐 자신의 이익을 취하며, 7백년간 나라를 이어간 고구려. 그 힘과 지혜가 몹시나 그리워지는 오늘날이다.

 

참고: <고구려, 전쟁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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