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에게 맞섰을까? ‘뿌리깊은 나무’

朱雀 2011. 10. 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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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한글창제 이야기를 미스터리식으로 담은 <뿌리깊은 나무>가 심상치 않은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1화에서 보여준 스타일리시한 액션 때문에 ‘제 2의 추노’라든가, 이후 보여진 멋진 구성과 이야기전개 때문에 벌써부터 시청자들의 호평이 인터넷 게시판을 수놓고 있다.

 

근데 이 드라마 여기저기 숨겨놓은 이야기가 꽤 많다. 하여 필자가 아는 바가 적지만 아는 바내에서 몇 자 적고자 한다.

 

 

1. 뒤바뀐 밀지를 보낸 석삼이의 비참한 최후

 

1화에서 호시탐탐 세종대왕의 목숨을 노리는 강채윤(장혁)의 이야기가 핵심축을 이룬다. 그는 어린시절 심온대감네에서 노비였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지키려다가 머리를 다친 이후 바보가 되었다. 그런 아버지는 평상시에는 아들의 짐이 되었으나, 심온 대감을 살리기 위해 세종이 보낸 밀지를 가지고 목숨을 다해 전달한다. 그런데 아뿔싸! 밀지는 태종측의 대신에 의해 뒤바뀌었다.

 

세종이 믿고 밀지를 전달한 생각시가 사실은 조말생측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잘 묘사하지만 어린 똘복이(강채윤)과 노비들은 글을 알지 못한 탓에, 그 밀지가 자신들은 물론이요, 심온대감을 죽이는 데도 모르고 전달할 수 밖에 없었다. 1회부터 글자를 모르는 설움 때문에 아비를 잃은 자식의 기막힌 사연을 배치해 놓음로써 드라마적 긴장감과 더불어 ‘한글창제’의 필요성을 기가 막히게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한글창제는 단순히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을 맘대로 적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까? 죽어가는 석삼이를 위해 심온대감이 대신 유서를 받아 적음으로써, 글을 아는 것에 대한 한(恨)은 어린 똘복이에게 커다란 짐이자 살아가는 이유가 될 것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이야기를 먼저 하겠다! 1440년대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가 서구유럽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대량으로 찍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있지 않다. 구텐베르크 이전까지 성서는 라틴어로 적어 있었고, 금속활자가 나오기 이전까지는 특성상 극소수의 책을 성직자들이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운운하는 성직자의 말은 엄청난 권위와 힘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왜? 다른 이들은 성경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정보를 안다는 것은 작게는 사람의 목숨을 비롯하여 크게는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로 인해 독일인은 독일어로, 영국인은 영어로, 프랑스인은 불어로 된 성서를 가지게 됨으로써, 성서에 대한 해석을 읽으면서 누구나 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이전까지 ‘정보의 독점화’가 이루어지던 시대에서, 정보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시대로 변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인터넷을 통해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현실만큼이나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창제를 한 것은 단순히 소수의 양반을 제외한 대다수의 백성들이 자신들이 답답한 사연을 말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글은 쉽기 때문에 누구나 하루면 익힐 수 있다. 그 글로 모든 것을 적을 수가 있다. 농사기술은 물론이요, 천문지리까지 말이다.

 

따라서 만약 한글이 창제되어 백성들에게 널리 쓰인다면, 기득권층인 양반들은 ‘정보의 독점’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따라서 신하들이 극렬히 반대하고, 이후에도 훈민정음을 ‘언문’이라 낮춰 부르면서 홀대한 것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젊은 세종이 빠진 마방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방진은 대각선이든 가로든 세로든 더한 값이 모두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마방진은 일견 보기에도 마법적이지만, 일종의 퍼즐이자 지적유희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학자적인 면모를 많이 보이는 세종이 빠졌다는 점이 무엇보다 효과적으로 보인다.

 

더더군다나 자신의 장인인 심온대감이 아버지 태종에 의해 누명을 쓰고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자, 방법이 없었던 세종이 도피처로 삼았다는 점에서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진다.

 

근데 여기서 한가지 반전이 일어난다. 바로 태종이 와서 자신이 마방진을 풀겠다면서, 규칙을 모두 어기고, 1자 하나만을 중심에 놓는 것이다. 태종의 그런 모습은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떠올리게 한다. 고르디우스가 묶은 매듭은 너무나 복잡해서 아무도 푼 이가 없었다. 소문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신전을 찾아와서 풀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풀수가 없자 화가 난 나머지 칼로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알렉산더 대왕은 익히 알려진대로 정복자로서 발밑에 두지 않은 땅이 없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꾸며진 이야기라는 설이 많다. 그러나 풀 수 없는 수수께기라는 점과 ‘그걸 푸는 자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라는 신탁 때문에 여러모로 생각거리를 주는 바가 크다.

 

마방진은 숫자열대로 규칙대로 배열해서 상수가 나오도록 하는 수수께끼다. 그걸 풀고자 애쓰는 세종은 세상을 정해진 규칙에 맞춰서, 그러나 가장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성군이다. 반면, 태종은 힘과 권력으로 자신에게 복종치 않은 인물은, 아니 복종해도 눈에 거슬리는 인물은 모두 칼로 제거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물이다.

 

따라서 마방진 하나를 놓고도 태종과 세종의 성격을 확실하게 대비시켰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장치라고 여겨진다. 태종이 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무왕(武王)이라면, 세종은 ‘조화와 균형’을 최고로 여기는 인물로 전형적인 문왕(文王)스타일이라 할 것이다.

 

 

3. 빈 찬합은 무엇을 뜻하는가?

 

세종은 태종이 건넨 찬합을 보고, 자신에게 죽을 것을 명한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찬합의 고사는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에도 나온다. 조조가 자신의 장자방으로 여겼으며, 그에게 충성을 다바쳤던 순욱은 말년에 조조가 왕위에 욕심을 내는 것을 눈치채고는 여러번 직언을 했다가 내쳐지게 된다. 그는 지방에 머물면서도 언젠가 자신이 재등용될 거라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 조조로부터 빈 찬합을 받고는 조조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 자살을 한다. 빈 찬합은 음식을 먹지 말라는 이야기니, 이는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고사를 <뿌리깊은 나무>에선 약간 꼬았다. 젊은 세종이 끙끙앓고 있던 33방진을 풀 수 있는 단서로 제공한 것이다. 동시에 태종 이방원이 아들 세종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 또한 완벽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으나, 빈 찬합을 세종이 채워야할 수많은 물음에 대한 물음으로 사용되었다.

 

 

 

4. 세종은 정말 태종과 대립했을까?

 

필자가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 인상 깊은 점은 젊은 세종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실제로 태종은 왕에 있을 때나, 상왕이 되어서도 군사력을 손에 쥐고 마음에 들지 않는 대신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리했다.

 

누구보다 자애롭고 백성을 사랑했던 세종이 그걸 보면서 마음에 아프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뿌리 깊은 나무>는 드라마로서 너무나 오늘날 적인 시선으로 당시의 일을 보고 있다.

 

그럼 조금 더 그때 시선으로 보자! 우선 세종은 잘 알려진 대로 태종의 셋째아들이다. 우리가 알기론 첫째인 양녕대군이 아버지 태종이 충녕대군을 아끼는 것을 보고 양보한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이곳저곳 사서를 살펴보면 영 꺼림직한 구석이 많이 보인다.

 

양녕대군은 월담을 해서 기생질을 했으며, 심지어 양가의 유부녀 어리를 억지로 끌고가서 자신의 술시중을 들게 했다. 이는 나중에 밝혀져서 그가 폐위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양녕대군은 훗날 세조가 되는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는데도 종친의 어른으로서 적극 지지하는 모양새를 취한다.

 

태종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을 개국하게 되고, 이후 조선을 굳건한 반석위에 두기 위해 여러 번 손에 피를 묻히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성군’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자신과 닮은 양녕대군보다는 누구보다 서책을 사랑하고 자애로운 충녕대군을 어어삐 여겨 왕위를 물려줄 수 밖에 없었다. <뿌리깊은 나무>에서 묘사되는 소헌왕후의 아버지인 심온대감을 죽인 사건은 실제로 역사에 기록된 일이다.

 

태종은 누구보다 외척이 권력을 잡을까봐 두려워한 인물이었다. 물론 심온대감은 누구보다 정직하고 충성스런 신하였지만, 영의정에 오른 데다 왕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위세가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상왕인 태종이 병권을 장악한 것에 대해 비난했다.

 

이는 자신을 배제하고 세종을 중심으로 뭉치려는 신하들의 모습을 아니꼽게 여긴 태종의 심산과 왕권강화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그의 염려등이 결합되어 심온대감은 드라마에서 묘사된 것처럼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잡혀 사사하는 이유가 되었다.

 

역시 드라마에서처럼 박은이 주도하여 결국 죽게 되고, 심온 대감은 억울한 나머지 후손들에게 ‘박씨와 혼인하지 말라’라고 유언을 남겼다. 이후 심씨 가문은 박은의 후손들과 혼인을 하지 않았고, 간혹 유언을 어기고 혼인한 이들은 후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온 대감 역시 자신이 죽는 이유가 상왕인 태종의 의지라는 탓은 알았으나, 신하로서 태종을 비난할 수 없었기에, 누구보다 자신을 죽이는데 앞장 선 박은을 지목한 것이었다.

 

태종은 익히 알려진 대로 많은 신하들을 죽였다. 정몽주를 시작으로, 정도전은 물론이요,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형제들도 죽였다. 게다가 자신의 장인과 처남까지 죽이고, 공신인 이숙번과 이거이 부자까지 줄줄이 죽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의 입장에선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개국 초기였고,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초창기에는 어쩔 수 없이 칼로서 반대파를 제거할 수 밖에 없다. 자칫 인정을 봐줬다가는 훗날 이쪽이 당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종은 얼핏 보면 다른 이를 죽이기 좋아하는 인물 같지만, 결코 그런 인물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심온 대감이 사사된 이후, 조정에선 소헌왕후를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위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태종은 일언지하로 물리쳤다. 이는 그가 단순히 외척세력을 제거하려했지, 죄 없는 왕후까지 내쫓을 마음은 없었던 것을 시사한다.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사서를 보면 세종대왕이 태종이 신하를 제거하는 동안 연회를 베푸는 등 다른 행위를 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 태종의 마음을 잘 알았기에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렸지만, 겉으론 웃으면서 연회를 즐기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훗날 세종이 우리가 ‘세종대왕’이라 부를 만큼 크나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데는 태종의 숨은 공로가 꽤 많다. 세종 때에는 공신을 비롯하여 왕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신하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기틀을 마련해서 세종이 훗날 업적을 세우는 기초를 마련했다.

 

세종은 이런 힘을 바탕으로 김종서와 이천등에게 6진과 4군을 설치하도록 하고, 대마도 정벌을 비롯한 혁혁한 외치를 이룩했다. 내치에선 정인지와 장영실등을 등용하여 해시계 물시계, 활자와 역법을 발전시켰고, 박연으로 하여 아악을 정리시켰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빛나는 업적은 한글창제일 것이다.

 

이야기가 조금 다른 곳으로 흘렀는데, 태종은 아들 세종이 보다 나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이 악역을 맡아 철저하게 행했다. 아마 그의 속마음은 ‘아들아 너는 성군이 되거라. 모든 악업은 이 애비가 모두 짊어지고 지옥으로 가마’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누구보다 효성스럽고 똑똑한 세종이 그런 태종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 턱이 없다. 따라서 속으론 나름 자신의 장인마저 처단하는 아버지의 처사에 그는 피눈물을 흘렸을 지는 모르나, 겉으론 내색하지 않고 조선의 태평성대를 위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드라마처럼 태종과 세종이 격하게 대립하는 일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세종은 아들로서 아버지를 이해하고, 신하로서 군왕의 뜻을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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