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공자가 소크라테스보다 위대한 이유, ‘중용, 인간의 맛’

朱雀 2011. 10.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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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태권브이와 마징가제트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수준의 유치한 질문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도올 김용옥 교수의 <중용, 인간의 맛> 강의를 보면서 새삼 동양철학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알기에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가 철저한 신앙인이란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중용 한글역주>와 <중용, 인간의 맛> 강의를 보면 그가 철저한 신앙인이었다고 나온다.

 

하루는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이 나왔는데, ‘아테네에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듣기에 따라선 매우 기분 좋은 일일 수도 있지만,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로선 난감한 고민에 휩싸였다.

 

그는 철저한 신앙인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과 무지함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인간이었다. 하여 그 신탁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는 신탁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당대의 위대한 정치가와 위대한 예술가 등등을 찾아가며 그들에게 예리한 질문을 던졌다.

 

당시 아테네에서 이런 문답은 아고라 광장에서 수 많은 젊은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루어졌다고 한다. 소크라테스의 철저한 물음은 수 많은 이들의 위선과 무지가 벗겨냈다. 한마디로 ‘잘난 척들 하지만 아는 게 제대로 없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한마디로 소크라테스의 물음은 타인을 향한 물음이었고, 그건 위선과 무지를 벗겨내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는 ‘지혜로운 자들이 실은 어리석은 자들이며, 하찮게 여겨지는 사람들이 더 지혜롭다’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당연히 지배계급의 미움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아테네 청년을 타락시키고, 다른 새로운 신을 믿는 다는 두 가지 죄목으로 법정에 고발당했다. 역시 이 과정은 수 많은 아테네인들이 보는 가운데 변론이 이루어졌고, 1000드라크메의 벌금을 물거나, 문답하기를 멈추면 사형을 면할 수 있다는 판결이 났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두 가지 모두 거부했다. 그는 1므나(100드라크메)밖에 낼 수 없다고 했고, 제자들이 모은 성금도 거절했다. “제 나이가 이미 살 만큼 산 나이입니다. 더럽게 사느니 정당하게 변론하고 죽음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독배를 들어서 자신의 인생을 마쳤다.

 

반면, 공자가 위대한 성인으로 칭송한 순임금은 어떠했을까? ‘요순시대’라는 말로 전설적인 제왕으로 칭송받는 순임금은 사실 별 볼일 없는 야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고수는 지위 낮은 서민이었는데, 순임금의 어머니가 죽자 새로 아내를 들였다. 그런데 계모는 물론이요, 새로 맞은 계모의 아들 역시 성질이 고약했다. 이들은 순임금을 죽이고자 했고, 여기엔 아버지까지 합세하는 불행한 일이 겹쳐졌다.

 

얼핏 들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같으면 순임금은 이들을 법정에 고발하거나 도망치는 게 마땅한 것이다. 근데 웬걸? 전설의 성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그는 지극한 정성으로 아버지와 계모를 섬겼고, 계모의 아들 역시 자애로 덮었다.

 

그래도 그들의 음모는 그칠 줄 몰랐다. 순임금에게 지붕을 고치라고 해놓고선, 밑에서 불을 지르거나, 우물을 파라고 해놓고선 우물입구를 메꾸는 패악한 짓을 계속해서 저질렀다.

 

다행히 순임금은 이를 예견하고 지붕에선 줄을 타고 타잔처럼 도망가고, 우물을 팔 때는 미리 다른 입구를 파두어서 피신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 모두를 감화시켜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

 

이는 말이 쉽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용서하기도 힘든데, 그들을 감화시키다니. 이건 순임금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일이라고 여겨진다.

 

요임금은 순의 명성이 자자하자, 그를 불러들여서 시험할 요량으로 자신의 두 딸을 한꺼번에 시집보낸다. 두 여인이 한 남자와 결혼하면 그 집안에서 싸움이 나기 쉽다. 그런데 순임금은 요임금의 두 딸을 맞이해서 행복한 가정 생활을 영위했다. 이를 통해 요임금은 순임금이 성군이 될 자질을 가졌음을 깨달았다.

 

순임금의 위대한 점 중에 하나는 그가 묻기를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평상시에도 좋은 말씀을 듣고자 애썼고, 한 가지 말을 들으면 이를 실천하고 애쓰는 것이 꼭 황하의 둑방이 터지는 기세였다고 한다.

 

순임금의 이야기는 믿기 어려운 구석이 조금 있다. 그러나 설사 지어진 것이라도 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대단하지 않은가? 소크라테스와 예수의 문답법은 타인의 무지와 위선을 벗겨내는 데 집중해 있었다. 따라서 타인의 미움과 시기 그리고 질투를 이끌어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순임금과 공자의 문답법은 철저히 자신의 수양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물음은 자신의 무지를 벗어나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방법이었다. 이런 수양법의 차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소크라테스식 문답법도 물론 위대하고 배울 점이 많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다툼이 발생하기 쉽다. 그러나 공자가 따른 순임금의 문답법은 결국엔 모두를 화합하고 이해시켜 함께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21세기에 필요한 철학과 리더십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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