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왜 우리시대의 화두가 ‘정의’일까?

朱雀 2010. 11. 19. 07:00
728x90
반응형



“정의의 이름으로 너를 용서치 않겠다!”

 

지금도 각종 드라마와 예능에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 대사는 TV 애니메이션 <세일러문>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유명한 세일러문의 명대사를 들고 나온 것은,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하기 위함이 아니다. 바로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다! 우리 사회에서 ‘정의’란 단어를 입에 올렸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의 반응은 이 대사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

 

한마디로 ‘너 초딩이냐?’이란 비아냥거림이나 듣기 쉽다. 또는 ‘아직도 그런 거 믿냐? 쯔쯔쯔’라고 비웃음이나 당하기 일쑤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선 안타깝게도 ‘정의’는 자리를 잡을 곳이 없다.

 

반면, 배트맨-슈퍼맨으로 대표되는 DC코믹스와 엑스맨으로 대표되는 마블코믹스가 국내에 출시될 때마다 족족 사는 내 입장에선 ‘정의’란 세상의 악과 싸워 지켜내야 할 ‘거창한 대의명분’이었다.

 

정의란무엇인가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 인문교양
지은이 마이클 샌델 (김영사, 2010년)
상세보기


그런데 이런 나와 나를 둘러싼 사회에 얼마 전 핵폭탄만큼 커다란 변화가 찾아왔다. 바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되면서 벌어진 진풍경이었다. 듣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정의란 무엇인가?>는 출간된 지 6개월 만에 무려 60만부가 넘게 국내에서 팔려나갔다.

 

국내 출판시장에선 10만부란 팔려나가도 소위 ‘대박’으로 여긴다. 그런데 ‘트와일라잇’ 같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머리 아프게 ‘정의’를 논한 철학서가 이렇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현 상황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게다가 <정의란 무엇인가?>는 결코 쉬운 책이 아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한 벤담의 공리주의, 존 롤스의 자유주의, 칸트,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차례차례 소환되어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겪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에 대한 각 철학자들의 입장과 주장을 보여준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미덕은 우리에게 ‘안드로메다’ 행성처럼 멀고, 뜬구름 잡는 것처럼 의미 없어 보이던 철학이 사실은 우리 생활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려주는 데 있다. 동성혼은 잘못된 것인가? 인간의 장기매매는 왜 허용해선 안 되는가? 안락사, 소수우대정책, 징병제 등등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해 각 철학자의 입장을 들려주어, 왜 2천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현대의 철학자들이 그토록 고민해왔는지 이해하게끔 해준다.

 

국내에서만 60만부나 팔렸지만, 책의 내용이 만만치 않은 탓에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읽었을지 의문시 되는 책이 바로 <정의란 무엇인가?>다! 자 그럼 <정의란 무엇인가?>가 우리 사회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이유를 이제부터 고민해보자.

 

-사진출처: <정의란 무엇인가?> 부록 DVD. 마이클 샌델 교수가 수업의 목적을 말하고 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책 제목만 듣고도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정의’란 가치가 퇴색한지 오래지만, 역설적으로 ‘정의’를 원하기 때문에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본다.

 

부녀자와 어린 아이를 끔찍하게 살해한 흉악범, 고위 관료의 딸이라는 이유로 능력과 아무런 상관없이 특채로 뽑힌 어느 여성, 편파적인 언론보도 등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선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

 

<정의란 무엇인가?>을 읽으면서 내가 가장 큰 공감을 하게 된 대목은 책이 거창한 대의명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란 결국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란 교훈을 주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서 ‘정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다면 큰 고민 없이 우린 옳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정답’따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린 고민하고, 박터지게 토론하면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셀러가 됨으로써 좋은 일은 이제 ‘정의’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비웃음을 당할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람들과 ‘정의’에 대해 좀 더 깊은 논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며, 하버드 강단에서 20년이 넘게 명강의를 펼쳐온 마이클 샌델 교수인 만큼, 앞으로 그의 책은 계속해서 출간될 것 같다. 적어도 지금처럼 화제가 되는 한은.

 

그러나 씁쓸함이 없는 건 아니다. 우선 과연 하버드대 교수가 ‘정의’라는 거창한 주제를 들고 나오지 않았다면 우리 사회에 이만큼 반향이 있었을까? 아마 프랑스나 유럽만 되었어도 이 정도 반향은 없었을 것이라 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마이클 샌델은 <정의란 무엇인가?>가 출간되기 전까진 대중에게 별로 친숙하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미국 하버드대 교수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크게 작용했고, 그 여파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본다.

-또한 아무래도 수업이 아닌지라, 마이클 샌델 교수가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을 밝힌다. 그러나 철학하는 입장에선 저자의 이야기도 꼼꼼이 따져보고 고민하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혹자는 나에게 묻는다. “우리나라에서 정의를 논한 적이 없지 않냐? 미국이 비록 천민자본주의가 날뛰는 곳이지만, 동시에 기초 학문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남아있기에 이런 학문적 저력을 보여주는 것 아니냐?”라고 반문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전까지 ‘정의’란 단어만 안 달았지 국내에도 괜찮은 철학서들이 나왔지만, 큰 반향은 얻지 못했다. 개인적으론 그중 최근에 출간된 <너의 의무를 묻는다>라는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위에서 언급했지만 400페이지를 넘는 두께만큼이나 내용 또한 만만치가 않다. 반면 <너의 의무를 묻는다>는 책도 가볍고 얇으며, 잘 읽힌다. <너의 의무를 묻는다>를 읽고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는다면 좀 더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다.

 

<정의란 무엇인가?>는 ‘정의’가 실종된 우리 사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켰고, 덕분에 이젠 그 논쟁은 자연스럽게 ‘도덕’으로 옮겨가 마이클 샐던의 <왜, 도덕인가?>와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 정치를 말하다>라는 책이 각각 나와 인기를 끌고 있다.

 

오늘날 같은 디지털 시대에 ‘정의’와 ‘도덕’처럼 얼핏 보면 구닥다리 같은 단어들이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는 상황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또는 변하지 말아야할 가치)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단면이 아닐까 싶다.

 

부디 이런 반향이 단순한 유행이나 화제로 끝나지 말고, 좀 더 토론하고 고민하는 풍조가 사회에 퍼져나가길 기대할 뿐이다. 더 바란다면, 그런 논의로 인해 우리 사회에 좀 더 정의가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제발!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