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선덕여왕>을 보면, 사극의 법칙이 보인다?!

朱雀 2009. 6. 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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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을 보다보니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이 드는 장면이 제법 된다. 단순히 어떤 영화나 특정 드라마에서 장면을 따왔다기보다 전체적인 느낌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 패턴을 답습하고 있는 탓이었다. 일단 떠오르는 대로 두서없이 써내려간다.



1. 주인공은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

뭐 이건 현대 드라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 <선덕여왕>처럼 ‘영웅’이 등장하는 드라마에선 거의 예외없이 나오는 것 같다. 엄청난 시청율을 기록한 <주몽>의 경우, 주몽은 자신의 친아버지가 해모수인 걸 모르고, 금와왕을 아버지로 알고 자란다. <선덕여왕>에선 후일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이 자신의 신분이 ‘공주’라는 사실을 모른 채, 신라에서 엄청나게 멀리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점원일을 하고 있다. 4회에선 시녀가 들고 간 갓난아기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일단 알았는데, 5회 예고를 보니 자신의 정체를 알기 까진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2. 주인공은 예언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엔 두 가지 큰 예언이 나오고 있다. 예언은 신비스러움과 더불어 사건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이런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은 사극에 ‘예언’이 등장한 건 <선덕여왕>이 처음이 아니다!

<주몽>의 경우 예언이 많이 나왔는데, 특히 후반부에 비금선 신녀가 "오래전에 일무광이 일어나는 것을 봤을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태양이 나타났다는 의미다. 옛 조선 유민의 피를 받은 사람이 나타나 부여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그 나라는 천하를 호령할 것이고 부여는 점차 쇠락해 종례는 망하고 말 것이다"라고 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고구려가 후일 강성해질 것을 예언했다.

<태왕사신기>의 경우, “쥬신의 왕이 태어나는 날 쥬신의 별이 빛나고 하늘의 신물도 깨어난다. 쥬신왕이 태어날 때 청룡, 백호, 현무, 주작 네 개의 신물도 깨어날 것이다”라고 해 담덕(배용준)이 후일 쥬신왕임을 암시했다.

<선덕여왕>도 마찬가지다. “북두의 일곱 별이 여덟이 되기 전에는 미실에 대적할 자가 없다”는 예언으로, 선덕여왕이 후일 미실에 대적해 싸울 것을 암시했다. 또한 '어출쌍생이면 성골남진(임금에게서 쌍둥이가 나오면, 성골 남자의 씨가 마를 것이다)' 이란 예언을 통해 후일 선덕여왕이 신라 최초로 ‘여왕’에 오르리란 암시를 주고 있다.

3. 주인공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하고, 악당은 천하의 몹쓸 놈이다.

<주몽>에서 주몽의 가장 큰 적은 대소였다. 아버지의 사랑을 주몽과 유화부인을 철전지 원수로 여겨 갖은 음모를 꾸민다. 주몽의 친아버지 해모수의 목을 잘라 한나라에 넘기고, 주몽을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다. 대소는 왜 그가 주몽을 미워할 수 밖에 없는지 이유를 보여줘, 어느 정도 설득력을 주었지만 역시 ‘악당’이란 면에선 변함이 없다.

반면 주몽의 경우, 너무 깨끗하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고 정공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고, 절대 더러운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서민적인 풍모를 지니고 있어, 부하들과 내기승부를 하다 져도 허허거리며 웃는 풍모를 보여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

<태왕사신기>에선 대장로(최민수)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화천회의 총수로 모든 권모술수를 부려 담덕을 위기에 몰아넣는다. 마지막엔 직접 손을 들어 죽이려 하지만, 결국 담덕의 손에 최후를 맞이한다. 근데 대장로의 경우엔 왜 그가 그토록 쥬신의 힘을 갖고 싶어하는지 별다른 설명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면에선 연호개가 더욱 악당스럽고 연민이 간다. 자신의 어머니가 왕을 독살하려 했다가 죽은 사실을 오해해 담덕을 미워하고, 그에게 복수하려 하니까. 뭐 동정의 여지는 있지만, 그가 벌이는 짓들은 용서하기가 어렵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은 끔찍할 정도로 사람을 챙긴다. 차를 밀거래 하려다 제후에게 잡혀간 상황에서 자신과 친한 로마국상인을 구하고자 앞으로 나설 정도다. 엉뚱하고 장난기 많고 그러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또한 주변을 놀라게 할 정도로 똑똑하다. 반면 초반부의 강력한 적으로 등장하는 미실의 경우 왜 그토록 그녀가 권력을 탐하는지 ‘이유’가 나오지 않고 있다. 자신이 한때 모시던 진흥왕이 죽가, 울면서 “내 사람들 입니다”를 외치는 장면에선 나름 소름끼치지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다.

4. 도망가는 곳은 사막이다?!

3, 4화의 주 배경인 사막은 <와호장룡>을 비롯한 여러 영화와 드라마에서 촬영장으로 쓴 곳이다. 뭐 그런 탓인지 <선덕여왕>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덕만이 살아가는 곳이 사막으로 설정했다.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막’이 등장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해신>에서 장보고가 죽을 고생을 한 곳이 사막이며, <태왕사신기>에서 백제의 성을 차지하기 위해 간곳도 사막이다. 돈 좀 써서 만들었다는 작품치고 사막이 안 나오는 경우가 없다. 이건 왜이럴까?

물론 중국의 땅이 넓고 사막화가 많이 된 탓에 사막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사막 말고 다른 곳은 나오면 안될까? 이를테면 숲속이나 산이나 바다라든지 강이라든지 조금만 생각해보면 되게 많은데, 굳이 사막을 고른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

5. 신물처럼 중요한 물건이 등장한다.

주인공이 지니든지, 아니면 뭔가 사태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지. 뭔가 물건이 등장한다. <태왕사신기>에선 한웅이 썼다는 전설의 활이 등장했고, <주몽>에선 다물활과 철기, 비서등이 나왔다. <선덕여왕>도 이런 일련의 흐름에서 멀어지지 않을 작정인지, 소엽도가 등장했다. 진흥대제가 호랑이를 잡았다는 믿기 어려운 내력을 가진 소엽도는 덕만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구했으며, 현재는 덕만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한 증표다. 설마 이후에 신물이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뭐 이밖에 찾아보면 다른 사극에서 비슷했던 많은 설정들을 <선덕여왕>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선덕여왕>을 보면서 내내 아쉬운 것은 도무지 ‘새로운 것’이 없다는 거다. 물론 창작을 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선덕여왕>은 약간의 변주가 되었을 뿐, 기존 판타지성 사극에서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비극적인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난 주인공이 후일 성장해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왕이 된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기에 충분하다. 허나 그들의 성격이 하나같이 한점 어두운 구석없이 착하고 똑똑하고 정의롭다면 이건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드라마마다 신라니, 고구려니, 고조선이니 하며 서로 다른 시대건만, 나열해놓고 보면 이야기가 비슷비슷한 경우가 너무 많다.

그뿐인가? 노골적으로 드라마들이 <삼국지>를 인용해 쓰는 장면에 이르면 시청자의 얼굴마저 간지러워질 정도다. 내가 보기에 <선덕여왕>을 비롯한 판타지 사극들이 이야기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작가들이 사료에 관심이 없는 탓이다. 한마디로 공부를 안 한다는 말이다.

그저 예언이니, 궁궐내 암투등 그동안 많이 보여줘왔던 것들을 적당히 잘 버무리고 약간 변조해 내놓는 결과로 만족하고 있다. 물론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조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형식의 드라마를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 예언이 없이도 재밌는 드라마는 불가능할까? 주인공이 조금 나쁜 놈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선덕여왕>은 이제 4화가 방송되었다. 그렇지만 여태까지 보여준 내용들은 하나같이 어디선가 본듯한 기시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남아있는 46부 동안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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