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이하 <클스>)의 제작진에게 사과를 하기 위해서다. 지난번 글에서 ‘막장’으로 갈까봐 염려되어 썼고, 11화를 보고나선 한동안 외면했었다.
9년간이나 서로를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너무나 사랑해온 한지완(한예슬)-차강진(고수)커플을 최대 장애물의 부모 세대의불륜 이었고, 게다가 뇌종양으로 얼마 살지 못하는 한지완의 아버지 한준수(천호진)이 차춘희(조민수)와 ‘사랑의 도피’를 택했을 때, 속으로 무진장 욕하면서 ‘다시 보지 않으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재방송으로 우연히 보고 나선 생각이 참 많이 바뀌었다. 생각해보면 <클스>제작진의 고충도 충분히 이해한다. 오늘날 너무 많은 멜로물이 TV를 통해 선보였고, 새로운 것을 선보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출생의 비밀이나 복수 등의 ‘막장 코드’ 없이 국내에서 드라마를 제작하기가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인터넷을 통한 실시간 감상후기는 때론 힘이 되지만, 때론 커다란 짐으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이전과 달리 시청자들의 활발한 의견개진이 가능해진 시점에서, 쪽대본으로 실시간 찍어내는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 시스템에서 제작진과 출연진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을지 안방에서 편안히 보는 필자는 상상하기 어렵다.
허나 그런 최악의 시스템에서도 <클스>처럼 제법 괜찮은 완성도를 갖춘 작품들이 나오는 걸 보면 또한 신기할 뿐이다. <클스>는 10화 이후로 다른 멜로물과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해버렸다.
10화 이후 복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 서영숙. 그녀는 <클스>의 유일한 악역이지만, 동시에 이해가 가는 인물이다. 차춘희는 산청에서 잘 살고 있는 자신의 남편과 자식을 빼앗은 원수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행동을 무작정 비난할 수 없는 것은 그녀만의 이런 안타까운 사연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악역과 다르다. 어떤 의미에서 그녀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어머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
을 끔찍이 여기고, 못난 딸내미는 맨날 구박만 하는 구시대적인 어머니다.
산청에선 제법 잘나가는 한의원댁 사모님이자, 서울대 수석까지 차지한 착하고 잘난 아들까지. 그야말로 그녀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허나 아들은 서울대 합격이후 동생이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겠다고 강에 들어갔다가 영원히 나오질 못했다.
게다가 업친데 덥친 격으로 남편은 첫사랑 차춘희를 잊지 못해, 자신의 눈앞에서 도피를 택한다. 아들과 남편마저 잃은 상황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었을 것이다.
근데 그마저도 원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차강진이 막아섰으니, 그 심정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미치고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자 귀한 아들인 한지용이 살아있던 시절로 퇴행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또한 그 대상이 원수의 아들인 차강진이란 사실 역시 매우 의미심장하다.
15화에서 영숙은 기억을 찾는다. 허나 거짓 행세를 계속하며 한지완과 차강진 그리고 차춘희를 괴롭힌다. 강진의 중요한 서류가 있는 노트북에 일부러 키위주스를 업지르고, 강진에게는 장가를 권하고 지완에게는 억지맞선을 붙인다. 게다가 춘희를 불러서는 밥상에 앉아 ‘책임지지 못할 자식은 낳는 게 아니다’라는 식의 적반하장식 훈계를 늘어놓는다. 미친척하면서 말이다.
그녀의 그런 행동은 무조건 ‘악’하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슬프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는 이유는 가슴 속에 치미는 분노를 풀 대상을 찾기 위해서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인간은 자신이 불운한 일을 당할 때 견디기 어려워한다. ‘나는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이런 일을 당할까?’하고 말이다.
그러나 삶이란 것은 어떤 의미에선 자연재해와 같다. 극중 지완이 ‘그냥 살다보니까 이런 일이 생긴거에요. 자책 같은 거 이제 그만 하자구요. 우리 지용이 오빠가 죽은 것도 내 탓도 아니고 강진 오빠 탓도 아니고. 그냥 살다보니까 재수가 없어서 그런 일이 생긴거에요. 우리 잘못이 아니야. 아무것도 우리 잘못이 아니야’라고 한 것처럼 말이다.
사랑은 어떤 의미에선 커다란 축복이자 동시에 저주이기도 하다. 우린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내가 사랑하는 남편(혹은 애인), 내가 사랑하는 자식, 내가 사랑하는 가족 등등. 허나 그런 사랑의 대상들은 언젠가 사라지고, 우린 그 빈자리를 사무치게 느끼며 눈물을 흘려야할 날들이 온다.
<클스>는 단순히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어쩜 우리의 삶 자체를 이야기하는 건 아닌지 생각이 든다. 비록 10화 이후로 기존의 멜로물과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재미가 좀 떨어지긴 했지만, 지금의 <클스>도 꽤 재밌고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다고 본다.
영숙이 자신들을 속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 행세를 하는 걸 알게 된 강진이 마지막화에선 어떤 행동을 하게 될지, 자그만치 20여년이 넘도록 꼬인 두 집안의 인연은 어떤 결말을 내릴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방송초부터 지금까지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주조연의 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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