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말하다

‘신데렐라 언니’를 위한 변명

朱雀 2010. 5. 16.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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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신데렐라 언니>에 대한 비판들이 많아졌다. ‘내용 전개가 지지부진하다’ ‘재미가 없다’ ‘너무 어렵다’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물론 이런 견해들도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제작진의 원래 의도는 일반적인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을 것 같다.

<신데렐라 언니>는 일견 시청률을 겨냥한 상업적인 드라마로 오해하기 쉽다. 문근영-서우-천정명-택연 등으로 대표될 수 있는 캐스팅이 그렇고, 동화 ‘신데렐라’를 떠올리게 하는 작명법이라던지, 대놓고 ‘문근영의 악역변신’을 운운했던 초창기 마케팅등을 떠올려보면 그렇다.

물론 <신데렐라 언니>는 <아이리스>와 <추노>를 잇는 KBS의 야심작으로, 아마 시청률 30%대의 위엄을 계속해서 달성해주길 바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엔 <신데렐라 언니>는 10화가 지나면서부터 KBS와 시청자의 바람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

 

 <신데렐라 언니>가 시청률을 노렸다면 벌써 포옹신은 물론이요, 키스신도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겨우 포옹신 한번 나왔다.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선택이었다. 앞으론 이마저도 없을지 모른다.

<신데렐라 언니>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겠지만, 철저하게 몇몇 주인공들의 내면세계를 정말 징그러울 정도로 묘사하고 성찰하게끔 만드는 드라다. 아니, 어떤 면에서 <신데렐라 언니>는 드라마가 아니다.

‘수녀 드라마’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문근영과 천정명은 서로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그 흔한 키스신은 물론이요, 포옹신도 이번주에야 겨우 한번 나올 정도로 스킨십에 인색하기 짝이 없다.

만약 일반적인 드라마 였다면, 제작진이 시청률을 노렸다면 벌써 남녀주인공들의 포옹신은 물론이요, 키스신이 나와줬어야만 한다(상대적으로 <개인의 취향>과 <검사 프린세스>에서 남녀 주인공들이 키스를 하며 본격적인 연애 모드에 들어간 것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더욱 확연해진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신데렐라 언니>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신데렐라 언니>가 최근 2주동안 탐닉하고 있는 주제는 ‘죄’와 ‘벌’ 혹은 죄와 구원이다.

 

기훈은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 순 없는지 물어본다. 은조와 함께 농사나 지으면서 사는 생활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이룰 수 없는 꿈이란 사실을 본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고? 자! <신데렐라 언니>의 스토리를 떠올려보자! 은조(문근영)는 죽은 구대성(김갑수)에게 깊은 죄의식이 있다. 자신을 친혈육과 같이 생각하고 한없는 사랑을 베풀며 보살펴준 구대성에게 제대로 ‘아빠’라고 불러주지도 못했다-아버지 대접은 물론 제대로 못해줬다-. 어머니 송강숙은 8년내내 부정을 저지르며, 구대성에게서 뭔가 뜯어내기만 했다. 한마디로 송강숙 모녀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다.

하여 은조는 그토록 미워하던 효선에게 마음을 열고 잘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하는 남자, 홍기훈(천정명)에게 잘해주라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홍기훈은 자신을 유일하게 거둬준 구대성을 실질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의 본심은 자신의 본가인 홍주가에서 대성참도가를 집어 삼킬 예정이라, 일단 자신이 먼저 가졌다가 돌려줄 작정이었다. 그러나 일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고, 대성참도가의 위기가 홍주가는 물론, 홍기훈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구대성은 그 충격으로 죽었다. 홍기훈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송강숙은 이번주 방송분에서 구대성이 남긴 일기를 보고, 자신의 죄를 깨달았다. 구대성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가 자신에게 한없이 베풀어주었는지 뒤늦게서야 깨닫고 말았다.

<신데렐라 언니>는 지난주부터 시청자들이 원하는 각종 사건을 통한 이야기 전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홍주가 사람들이 대성참도가를 차지하기 위해 벌이는 사건들은 철저히 주변부 이야기로만 돌아다니고 있다.

 

<신데렐라 언니> 제작진이 시청률을 높이고 싶다면, 통속적인 방법을 써서 얼마든지 ‘재미’를 줄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신데렐라 언니>의 속셈이 드러난다. <신데렐라 언니>는 통송적인 이야기의 틀을 유지하고 있지만, 정작 이야기 진행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는 ‘문학’에서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고, 성찰할 때 주로 쓰는 방법이었다.

은조는 죽을 것이다! 그녀는 대성참도가를 구대성이 있을 때처럼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여 그녀는 먹는 것과 자는 것을 잊고 오로지 효모에 매달리며 과로하고 있다. 그러나 홍주가의 개입으로 그녀의 뜻대로 되고 있지 않다.

홍기훈은 은조보다 상황이 더 나쁘다. 그는 용서받은 대상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홍기훈을 이미 용서해줬다. 정작 홍기훈은 너무나 쉽게 용서를 받은 탓에 자신을 더욱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구대성은 엠블란스에 실려 힘겹게 눈을 뜬 상태에서 기훈을 향해 ‘괜찮다’라고 말했다. 세상에! 이런 사람이 정말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신데렐라 언니>의 구대성은 단순히 착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인물이다. 심지어 자신을 배신하고 등에 칼을 꽂아도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라며 이해부터 먼저하는 인물이다. 이런 이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알 수 없지, 여하는 그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효선과 기훈의 말마따나 ‘세상에 이런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구대성은 신에 가까운 인물이다.

강숙-은조-기훈은 그런 면에서 신을 팔아넘긴 혹은 죽여버린 죄인들이다.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지만. 그들을 한없이 사랑해주던, 한없이 이해해주던 신을 죽여버렸다. 그들의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신데렐라 언니>는 이번주에 시청률이 떨어졌다. 20%가 넘던 시청률이 19%대로 내려앉았다. 어떤 면에서 이번주 <신데렐라 언니>는 재미가 없을 수 있다. 시청자에게 생각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생각없이 그저 TV를 보며 즐기던 요즘 시청자들에게 감히 <신데렐라 언니>는 인간이 늘 고민하고 어떤 면에선 무서워하는 죄와 구원에 대해 정말 무서울 정도로 파고들어가서 묘사하고 있다.

은조는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대성참도가를 살리기 위해 애쓰다가, 계속해서 다가오는 위기들에 기훈이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녀는 쓰러지고 죽음에 내몰릴 것이다.

기훈도 자살할 가능성이 높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구대성을 죽였고, 은조와 효선에게 용서받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은조가 죽는다면, 결국 그는 따라죽을 가능성이 꽤 높다.

 


진실을 하나씩 알게 되는 구효선. ‘구대성의 환생’이래도 좋을 그녀는 과연 강숙-운조-기훈을 용서할 수 있을까?

구대성의 죽음과 함께 은조와 싸우기를 포기한 효선은, 계모 송강숙의 부정을 알고 생애 처음으로 미움을 배웠다. 그녀가 어떤 식으로 송강숙과 은조 그리고 기훈을 용서하게 될지가 ‘<신데렐라 언니>의 핵심’이라고 여겨진다.

<신데렐라 언니>는 ‘신데렐라’라는 동화속 주인공 이름을 그대로 차용해, 마치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를 해줄 것처럼 우리를 속였다. 그러나 사실 <신데렐라 언니>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죄를 짓는다.

선한 의도였던, 악한 의도였든 관계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때로는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우리를 괴롭게 만든다. 때론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종교에 귀의하거나 명상과 참선등에 매진하게 된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진정한 사랑은? 등등. 뭐하나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철학적인 난제들을 감히 이 시대에 <신데렐라 언니>는 시청자들에게 묻고 있다. 핫미디어인 TV에서 감히 ‘쿨미디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당신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재미가 없고, 어렵다 라고 하는 이유라고 감히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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