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왜 한국판 데즈카 오사무는 탄생 못하는가?

朱雀 2010. 12. 1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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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소년 아톰> <리본의 기사>의 작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데즈카 오사무는 ‘일본만화의 신’이라 불린다. 왜 그럴까? 그에게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어서 작품만 그리면 모두 명작이 탄생해서? 아님 극장판이나 TV판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마다 모두 흥행에 성공하는 '미다스의 손'이라서? 전부 아니다. 그가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시스템을 만들고 후진을 양성했기 때문이다!

 

1961년 데즈카 오사무는 무시 프로덕션을 창립하고, 1963년 그 유명한 일본 최초의 애니메이션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해서 일본 TV 애니메이션에 ‘리미티드 기법’을 도입하게 된다. 이전까지 애니메이션은 미국 디즈니사의 영향으로 1초에 24장을 그리는 ‘풀 프레임 방식’이 유일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환경에선 그런 막대한 제작비를 댈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데즈카 오사무는 움직이는 적은 장면 등에선 작화수를 1초에 12장까지 줄여 움직임을 간소화했다 또한 비슷한 장면에선 같은 장면을 반복(예를 들면 변신로봇물과 변신소녀물에서 변신장면을 똑같이 사용)하는 방법도 사용했다. 대신 세부묘사를 늘려 작화수의 부족을 보완하고, 움직이는 많은 장면에서 프레임을 늘리는 방법 등으로 보완했다. 1963년 도입된 리미티드 기법은 이후 일본 TV 애니메이션이 미국을 넘어서서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게 되는 제작방식으로 자리를 매김하게 된다. -현재까지 일본 TV애니메이션은 리미티드 방식을 주로 이용한다-

 

또한 데즈카 오사무는 <마징가 제트>의 나가이 고, <11인이 있다>의 하기오 모토, <기동전사 건담>의 토미노 요시유키, <메트로폴리스>의 린타로,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데자키 오사무 등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본 만화계에서 한 획을 그은 수 많은 대작가들을 모두 키워냈다. 물론 그의 수제자는 단연 그의 그림체와 정신을 이은 린타로지만, 각자 나름대로 개성을 꽃피워 일본 만화계를 풍성하게 해준 그의 제자들의 바탕은 데즈카 오사무이기 때문에, 그는 ‘일본만화의 신’이자 ‘아버지’로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만화가가 시대를 주름잡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드래곤 볼> <슬램덩크> <원피스> 같은 작품들이 탄생하는 것만 해도 이웃나라인 우리에겐 너무나 부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선 데즈카 오사무 같은 이들(아니 토리야마 아키라 같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태어나지 못한 걸까?

 

여기엔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데즈카 오사무가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할 당시, 일본은 전쟁에서 패배한 후 깊숙한 패배감과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일본을 이긴 미국은 그 트라우마의 주범이었다.

 

아톰은 아주 작은 로봇이지만 십만 마력의 힘을 지녔다. 거기에 자신의 약점을 뛰어난 머리와 임기웅변으로 이겨내며, 자신보다 몇 백배 거대한 적을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작은 일본이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거대한 적인 미국을 이길 수도 있다’라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우주소년 아톰>을 통해 일본인은 본 것이다. 즉 그들이 본 것은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였던 셈이다.

 

-어린 시절 <우주소년 아톰>을 보고 과학자나 기술자가 된 이들이, 일본의 전자-항공-우주산업이 발달에 지대한 공을 세운 것은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반면 우리는 어땠는가? 1967년 신동헌 감독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 애니메이션인 <홍길동>이 탄생했다. 그리고 개봉 4일 만에 관객수 10만이 넘는 기염을 토했고, 같은 해 발표한 <호피와 차돌바위> 역시 흥행에 성공한다. 그러나 연이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제작비를 회수하지 못해 빚더미에 앉게 된다.

 

당시 영화사들이 돈만 챙기고, 신동헌 감독에게 정당한 몫을 주지 않은 탓이었다. 이에 신동헌 감독은 이런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제작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우리나라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역사가 허망하게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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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김청기 감독이 <로보트 태권브이>를 발표했을 때만 해도, 우리와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수준은 엇비슷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거듭된 무관심과 제작환경에 대한 지원이 없어서, 김청기 감독이 거의 혼자서 분전하다가 끝을 맺는 형국이 된다.

 

이런 환경에 전환점을 마련하고자 많은 이들이 애를 썼는데, 나는 그중에서 이현세를 가장 눈여겨 보는 편이다. 이현세는 <공포의 외인구단>이후 내는 만화책마다 성공해왔다.

 

그리고 그는 지난 1996년 자신의 동명원작만화인 <아마겟돈>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지만, 흥행에서 엄청난 참패를 맛보게 된다(제작비만 약 40억원이 소요된 작품은, 당시 서울관객만 약 7만명에 못 미치는 관객을 기록했다). 허나 그는 자신의 실패에서 후진들이 배우길 원해 ‘백서’를 발간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굳이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필요가 없었다. 내는 만화책마다 성공하고 있었기에 만화가로서나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상황이었다. 그가 <아마겟돈> 제작에 나선 것은 ‘돈’보다 척박한 국내 애니메이션 환경에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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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고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1997년 7월 검찰에 의해 소환되어 조사받게 된다. 바로 <천국의 신화>가 '음란물'이란 이유였다. 3년이 넘게 끌던 재판은 그가 미성년자보호법을 저촉했다는 이유로 벌금 3백만원에 ‘유죄’로 판결되고 말았다. 대한민국 만화에 철퇴가 내려진 순간이었다.

 

이현세는 단순한 만화가가 아니다. ‘국민만화가’란 칭호가 아깝지 않은 그가, <천국의 신화>라는 작품으로 미성년자 보호법을 어겼다는 판결은, 지금 생각해봐도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이후 도서대여점이 전국에 깔리면서 만화잡지가 사라지고, 만화책 시장 자체가 국내에서 사라진 것은 정해진 수순이 아니었나 싶다. 일본은 만화를 통해 희망을 보고, 거기에 미래를 담아냈다. 반면 우린 끊임없는 마녀사냥을 통해 만화를 억압하고 불태우고 무시하고 탄압했다. 그 결과 이젠 웹툰 외엔 남아있는 만화를 보기 힘들어졌다.

 

누군가는 데즈카 오사무 같은 이가 안 나오는 것을, ‘한국엔 인물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 상황에선 아무리 데즈카 오사무 같은 인물이 태어나도 그 능력을 펼칠 수가 없다. 우리 나라는 그런 나라다. 오직 만화를 돈으로만 접근하고, 표현의 자유는 억압하고, 만화가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도 마련해주지 않으면서, 누군가는 ‘왜 우린 일본처럼 만화(혹은 애니메이션)가 발전하지 못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참고) 하비스토리
최호철, 박인하의 펜 끝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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