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왜 교육인가?

朱雀 2010. 12.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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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친구들 중에는 자기 자식들만큼은 공부걱정 없이 ‘마음껏 놀게 해주겠다’라고 호언장담하는 녀석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두고 보자’고 했고, 결혼 후 아이들이 유치원을 갈 때쯤이면, 어떤 식으로든 과외를 시키고 있었다.

 

내가 만나서 옆구를 툭 치며, ‘뭐야? 말이 다르잖아’라고 농을 건네면, 친구들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너도 자식 낳아봐라’라고 받아쳤다. 나도 반장난으로 그런 짓(?)을 했지만, 부모가 된다면 별수 없을 거란 생각엔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부모가 되면 자식의 미래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비정하거나 정말 낙천적인 부모가 아니라면). 게다가 옆집 순돌이는 벌써 걸음마를 시작하고 말까지 하는데, 우리집 아이는 아직 제대로 기지도 못하면 괜시리 걱정되고 벌써부터 ‘경쟁에서 탈락하는 것 아냐?’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게 부모 마음 아니던가?

 

우리가 교육에 집착하는 것은 아이에게 보다 나은 미래를 보장해주기 위해서다. 우리 사회는 공부를 잘하는 이가 출세해서 더욱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무한경쟁사회’다.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이에게 월 1십만원짜리 과외보다, 1백만원짜리 과외를 시키면 서울대에 갈 가능성이 높아지고, 1천만원짜리 과외를 시키면 상류층이 될 탄탄대로를 건널 수 있는 그런 사회다.

 

TV를 보면 공교육 전문가가 아니라 모학원의 강사가 입시전문가가 소개되어 나오는 요상한 사회. 유치원생부터 이미 학원을 다니며 늦은 밤까지 입시생처럼 공부하고 있는 사회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이런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에는 누구나 공감한다. 누구나 바뀌어야 한다고 소리높여 주장한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자식은 일단 공부부터 시키고 보는 게 또한 대한민국의 부모들이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에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는 게, 모두가 ‘내 자식만은..’이란 이기심과 편애주의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이 앞장섰다가 자기 가족이 불이익을 당하는 것은 끔찍하게 싫어한다.

 

진정한 교육이란 무엇일까? 경쟁으로만 치닫는 우리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무터킨더님이 쓴 <꼴찌도 행복한 교실 : 독일 교육 이야기>(이하 ‘<꼴지도 행복한 교실>)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 독일 교육을 10년이 넘도록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259페이지에 달하는 책장은 정말 너무나 수월하게 휙휙 넘어가게 잘 읽힌다. 한 소재에 대해 불과 열페이지도 안되게 서술하지만, (반대로 메시지는) 어느 것 하나 쉽게 넘어가질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잊고 있었던 중요한 것들, 혹시 알지 못했던 중요한 것들을 짚고 넘어가기 때문이다.

 

-만약 책 내용의 무게를 잴 수 있다면 <꼴지도 행복한 교실>의 무게는, 1톤짜리 트럭과 견주어도 절대 가볍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책의 내용과 메시지는 허투루 넘어갈 수 없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꼴지도 행복한 교실>의 첫 꼭지는 ‘아프리카를 돕기 위한 초등학교 프로젝트’를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아프리카가 우리 마음을 움직인다’라는 주제로 일주일동안 공부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다!

 

우리에게 아프리카란 그저 미개한 사회고, 불쌍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대륙일 뿐이다. 그리하여 성금을 보내거나, 우리보다 열등한 나라로 보는 걸로 끝난다. 그러나 독일의 학교에선 전혀 달랐다. 학생과 교사는 아프리카의 역사와 전통문화를 공부하고 어떻게 하면 아프리카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을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다.

 

그리하여 독일의 아이들은 우리처럼 아프리카를 ‘불쌍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함께 놀고 웃으며 배운 이야기를 통해 좀 더 편견없이 그들을 바라보며 도울 수 있는 시선을 배우게 된다.

 

아! 이런, 우리와 이렇게 다른 접근법이라니. 마치 번개를 맞은 듯,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번개를 맞은 충격으로 다음 장을 읽어가니, 충격은 계속된다. 우리라면 그냥 책으로 배울 숲에 대한 이야기를, 독일 학생들은 직접 체험하기 위해 판초의를 입고 자연을 관찰하는 법을 배운다.

 

자전거 면허시험을 받고, 모두가 토론의 달인이 될 수 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조성하고, 어떤 게 ‘행복한 삶’인지 알기 위해 행복수업을 따로 배운다. 숙제조차 저작권을 지키지 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고, 수학은 정말 지리할 정도로 천천히 진도를 나가 아이 스스로가 깨닫도록 도와 창의적이게끔 유도한다.

 

프랑스 교육에 대해선 어느 정도 정보를 들은 바가 있었지만, 독일은 상대적으로 프랑스보다 ‘교육에 있어선 못하다’라고 들었었다. 그러나 <꼴지도 행복한 교실>을 읽으면서 얼마나 어이없는 정보였는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우리처럼 대학에 서열이 없고, 교사가 학생의 모든 능력을 끌어내기 위해 애를 쓰고, 답보다는 과정을 중요시 여기고,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한 과제해결을 통해 ‘상생’하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만드는 독일의 교육과정은 그야말로 우리가 늘 입으로만 말하던 ‘전인교육’ 그 자체였다.

 

나는 ‘대안을 제시하라’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대안’이란 하루아침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가 지혜를 모으는 과정 속에서 대안이 생겨난다고 믿는 쪽이다. 그런데 왜 그런지 우리 사회에선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대안을 제시하라’는 요구를 하고, 제대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면 비웃는 못된 풍토가 만연해 있다.

 

그런데 <꼴지도 행복한 교실>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교육’에 대해 독일교육을 예를 들어 훌륭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독일교육이 그대로 우리에게 바로 적용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협력보다는 경쟁을 우선시하고, 같은 반의 친구들조차 친구가 아닌 ‘경쟁자’로만 보는 우리 아이들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불행할 수 밖에 없다.

 

아이가 행복하고 사회가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꼴지도 행복한 교실>은 그런 매우 어려운 질문에 대해 상당히 올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본다.

 

교육은 중요하다! 단순히 한 사람을 사회의 일꾼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민으로서 올바른 주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줄세우기에 골몰한 나머지, ‘인격’이나 ‘시민의식’은 잊어버린 지 오래가 되었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선 고소득-고학력인데도 말도 안되는 짓을 저지르는 이들이 늘어났다.

 

청문회를 봐도 이젠 ‘위장전입’정도는 흠도 아닌 세상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일반 시민이 그랬다면 최소 벌금형이나 징역형이 될 것들이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거리낌 없이 저지르는 요상한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교육인가? 바로 최소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선 부끄러워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선 모두가 ‘잘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를 위해선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교육을 통해 다양함이 공존하는 세상을 배워야 한다. 거기에는 성적 소수자라 하여 차별을 받거나, 다른 문화나 관습을 가졌다고 해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된다. 다수라 하여 소수를 깔보거나 차별하는 세상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이 왜 그토록 중요한 것인지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인류는 오늘날 여러 가지 위험에 직면해있다. 기후온난화와 자원의 무기화, 식량생산 문제, 실업 문제 등등. 우리가 오늘날 직면해 있는 문제들은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이런 문제는 다양한 시각과 협력을 통해서만 해결이 가능하다.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 서로 협력해야만 ‘선을 이룰 수 있다’. 그것이 교육이 마땅히 밑바탕이 되어야할 가능한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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