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게임은 죄가 없다!

朱雀 2010. 12.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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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서울 잠원동에선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23살 박모씨가 자신의 집밖으로 나가 마침 귀가중이던 김모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사건이었다.

 

김모씨와 박모씨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전형적인 ‘묻지마 살인’이 또 한번 벌어진 순간이었다. 뉴스에 따르면 박모씨는 미국 유학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난 7월 귀국한 뒤에 폭력적인 게임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주말 MBC 뉴스를 통해 소식을 접하면서 먼저 든 생각은 ‘또 게임을 마녀사냥하겠군’이었다. 관련정보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아니나 다를까 ‘폭력적인 게임’에 대해 한목소리로 규탄(?)하고 있었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생각해보자! 만약 폭력적인 게임이 사람의 살인충동을 강화시킨다면, 오늘날 그 게임을 즐기는 게이머들은 모두 잠정적인 범죄자들이란 말인가? 아니면 관점을 조금 바꿔서 박모씨가 흉기로 사용한 칼은애초의 목적에서 벗어났으니 그런 칼을 제작한 공장들은 모두 폐쇄조치해야 하는 것일까?

 

우린 위에 든 두 가지 예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안다. 왜냐하면 게임을 좋아한다고 살인마가 되거나, 범죄자가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또한 흉기로 쓰인 칼의 경우, 애초의 용도를 벗어난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문제지, 물건을 제작한 제조사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다면 왜 ‘폭력적인 게임’에 대해서만 이토록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는 걸까? 그건 희생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범행을 저지른 박모씨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손쉬운 게임으로 소일거리를 했을 뿐이다. 그가 게임을 하다가 살인충동을 느꼈다고 해도, 그건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 말로 TV를 보다가 충동을 느낄 수도 있고, 과일을 깎아먹다가 느낄 수도 있다.

 

TV뉴스도 경찰의 입장에서도 범죄자가 ‘왜 이런 범죄를 저질렀느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 손쉬운 답변을 엉거주춤하게 내놓은 꼴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학자도 게임과 범죄의 상관성에 대해 자신 있게 답변을 내놓지 못한 상태로 알고 있다.

 

오히려 심리학자들은 오늘날 극도로 정보화된 사회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오늘날 사회는 극도로 개인주의로 흐르고 있다. ‘무한경쟁주의’로 인해, 일정한 테두리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극심한 패배주의를 겪게 된다. 또한,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로 진입하면서 공동체는 해체되고, 가장 최소단위인 가족마저 해체된 사회로 이르렀다. 사람들은 이제 ‘나 혼자만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고, 그 범위는 기껏해야 ‘내 가족’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하여 우리는 남의 불행과 아픔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 근데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오늘날 범죄를 저지르는 많은 이들의 환경을 보면 불우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그런 불행을 사회로 돌리고 모든 구성원에 대해 화를 낸다. 그리곤 이번처럼 길가를 행인에게 칼을 휘두르는 일명 ‘묻지마 살인’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만약 우리 사회가 줄세우기를 멈추고, 이런 사회에 부적응한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기울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그는 범죄를 저질렀을까? 20세기 사회는 ‘남’보다 나를 생각하는 지극히 개인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혼자만 생각하는 개인주의는 오히려 개개인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누구도 만족스런 상황에 도달할 수 없었기에.

 

아직 산업화가 되기 전 우리 농촌사회를 떠올려 보자. 거기선 어떤 집이 갑작스런 사고로 부모가 돌아가면, 아이들을 공동으로 키웠다. 누군가가 상을 당하면 함께 장례를 치러주었다. 비록 당시엔 가진 것이 조금 부족했지만, 함께 울고 웃으면서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오늘날은 어떤가? 부모가 죽으면 아이들은 고아원을 전전해야 한다. 상을 당하면 상조를 통해 장례를 지내는 사회가 되었다. 꼭 불우가정이 아니더라도 행복한 가정에서도 흉악한 범죄자가 나오기도 한다. 미야베 미유키의 대표작인 <모방범>을 보면 다양한 인간군상을 통해 오늘날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의 피폐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유영철 같은 희대의 살인범을 통해 우린 ‘싸이코패스’란 단어를 알게 되었다. 살인 같은 강력한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에 전혀 거리낌이 없는 이들은 놀랍게도 전체 인구수에 약 2-3% 수준에 이른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공간에 ‘싸이코패스’가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쫘악 끼친다. 그러나 선천적으로 감정에 문제가 있는 이들도 교육을 잘 받고, 주변에서 사랑으로 감싸준다면 ‘범죄자’가 될 확률은 극히 줄어든다고 한다. 즉 싸이코패스라고 해서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 오늘날 우리 사회에 강력한 범죄가 일어나고, ‘묻지마 살인’이 벌어지는 이유는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구미유럽에서 공자의 가르침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단순히 중국이 미국에 대적할만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했거나, 한국의 놀라운 성장 때문이 아니다.

 

구미유럽의 철학에선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한계를 느껴서 ‘나’보다 ‘우리’를 앞세우는 동양철학에서 답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구미유럽에서 <논어>를 읽고 <대학>과 <중용>등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엔 이런 이유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마녀사냥을 통해 ‘게임’을 단죄하기란 너무나 쉽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묻지마 살인’같은 범죄가 결코 줄어들지는 않는다. 힘들고 당장 눈에 결과는 나타나진 않겠지만, 감정적인 해결이 아니라 진정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 될 시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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