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를 논하다!

배우 문성근에게 박수를 보내는 이유

朱雀 2010. 12. 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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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영화배우 문성근씨가 공개강연회를 해서 찾게 되었다. 오후 1시. 아무래도 이른 시간 탓인지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지는 않았다. 30분간 음악회가 열렸지만, 강연회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지겹기까지 했다.

 

열심히 연주한 분들에겐 다소 미안한 이야기지만, 문성근 씨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너무나 궁금한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등장했다. 연주에 신경을 쓰는 사이, 그는 이미 단상 아래에 와 있었기에 미리 알아보지 못한 것이 놀라웠다. 당연히 그가 오자마자 눈치챌 거란 예상과 달리 그는 어딘가 평범해보였다.

 

‘영화와 삶’이란 주제를 꺼내들은 그의 이야기는 처음에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자녀들이 영화감독이나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과연 괜찮은 거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서두를 장식했다..

 

그는 특유의 어조와 차분한 말투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잘 알려진 대로 인쇄물은 상상력을 자극하지만, 읽는 이에게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한다. 그러나 영화는 소파에 널부러져서 볼 수 있으며, 보다 직접적으로 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그래서 젊은 세대가 이에 열광하고 유럽에선 이미 50-60년대에 많이 진출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50년대는 정창화 감독이 홍콩영화를 가르칠 정도로 역량이 뛰어났다. 그러나 60년대 쿠테타 이후 정차가 영화를 검열하는 시대가 되면서 그런 역량이 줄어들고 만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감독 이원세 (1981 / 한국)
출연 안성기,금보라,전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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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안성기 씨가 주연한 영화인데, 그는 ‘가장 참혹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너무나 편집된 탓에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감독은 이런 현실에 너무 화가 나서 끝내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고 말았지요.”

 

그의 이야기는 이제 1980년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옮겨갔다. 당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고 싶었던 젊은이들은 영상으로 그 상황을 접하게 되고, 그때의 충격으로 영화계에 투신하게 되었단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장선우, 박광수 감독 등이었다.

 

정치권력이 ‘표현의 자유’를 억누르는 것은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그러나 NGO를 비롯한 이시대 지식인들의 열렬한 지지와 존경을 받는 학자 노엄 촘스키는 오늘날 한국을 가리키며 ‘경제로는 선진국 대열로, 정치로는 민주화를 이룬 나라’로 손꼽았다는 예를 들었다. ‘2차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시작해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고 아이들이 모두 핸드폰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부유해졌으며, 인터넷으로 정치를 민주화시킨 나라’라는 말은 한껏 자긍심을 세우는데 일조를 했다.

 

문성근 씨의 이야기는 이제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우리나라는 남북한 대치되어 있고, 짧은 시간 안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루면서 무궁무진한 소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굴뚝 산업에서 재벌이 나올 수 있었지만, 오늘날은 IT산업이나 문화산업 혹은 생명과학이 아니면 큰 돈을 벌기 어려워졌습니다. 문화산업에서 창의력을 발휘한다면 계급이동이 가능하지요”

 

그는 스필버그 감독과 다큐멘터리로 유명해진 마이클 무어를 예로 들었다. 특히 <식코>를 통해 미국의 의료보험체계를 비판한 마이클 무어는 버락 오바마가 대선에서 승리하는데 일조를 했음을 강조하며, ‘문화의 힘’을 역설했다.

 

“저는 무말랭이를 싫어합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무말랭이를 반찬으로 싼 탓에 싫어한다고 했다. 남편의 해진 런닝으로 속옷을 만들어 있을 정도로 근검절약하는 어머님 밑에서 그가 겪어야 했던 경험들이었다.

 

그러면서 오늘날 20-30대로 화제가 전환되었다. “오늘날 20-30대는 배고픈 경험이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지난 10년간 억압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지냈던 그들은 현재 상상도 못한 부자유 속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아마 물질적인 풍요를 겪으며, 이전세대와 달리 개인의 자유를 만끽하며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세대를 이야기 한 듯 싶다. 문성근 씨는 전체주의-자유주의-공동체주의로 발전해간다고 믿는 것 같았다-

 

문성근 씨의 이야기는 이번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는 익히 알려진 대로 건설회사에 취직해서 무려 8년간이나 일했다. 그러나 하나의 부속품처럼 마모되는 자신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그는 ‘뭔가 창조적인 일을 해볼까?’라는 생각으로 다시 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묘사하는 영화감독-배우들의 삶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직장에서 100을 가진 사람은 100원 이상의 대우를 받습니다. 90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85-90원정도의 대우를 받지요. 그러나 이곳에선 100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만원을 받고, 90을 가진 사람은 90원만 줍니다. 그리고 60을 가진 사람들은 물건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배우 시절 실제로 촬영현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이어졌다. 엑스트라들이 지나가는데, 연기가 마음에 안 들었던지 연출자가 “야! 저거 뭐야? 치워”라는 말을 한 것.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하는 그 상황에서 그는 무척 힘들었다고 이야기했다.

 

연기에 대한 그의 이론은 인정하고 싶지만, 어느 정도는 동감할 수 밖에 없었다. 연기란 ‘노력’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실었다. 말론 브론도, 잭 니콜슨 같은 이들의 연기력은 1세기에 한명 태어날까말까 하는 재능이기 때문에, 노력으로 쫓아갈 수 없노라고.

 

오죽하면 안소니 퀸이 70이 넘어서 자신의 자서전에서 로렌스 올리비에를 뛰어넘을 수 없는 자신을 견디지 못해서 ‘마약에 손댔다’라고 고백할 지경이었단다.

 

“물론 ‘재능이 있는가?’는 알기 쉬운 부분이 아닙니다. 송강호의 경우 2번이나 대학에서 떨어지고, 어렵게 들어간 극단에서도 거의 배역을 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우연히 연극을 보게 되었는데, 너무 잘해서 이창동 감독에게 소개시켜줬지요. 그리고 <초록물고기>에 출연하게 되었지요. 원래 유오성에게 갈 배역이었는데, 일이 될려니 그렇게 흘러간거죠. ”

 

그는 이제 하늘나라로 돌아간 이은주와 최진실을 떠올리며 ‘미치겠다’라고 표현했다. 우리 사회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이 심각하다. 예쁘지 않으면 사람 취급 자체를 안해준다. 미국 최고의 배우인 메릴 스트립이 만약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결코 데뷔조차 불가능했을 거라고.

 

그런 탓에 우리 여배우들은 자신의 몸을 자유롭게 활용하지 못한다. 팔을 들 때도 겨드랑이가 보일까봐 몹시 전전긍긍하고, 편하게 몸을 움직이다가 ‘헤프다’라는 말도 안되는 모함을 들을까봐 말이다.

 

외국에서 영화를 찍을 때 심리치료사가 대동해서 배우가 촬영이 끝나면 원래 생활로 돌아오기 위해 도와주는데, 우리 현장에선 안타깝게도 그런 일이 없다. 아역배우가 성인배우로 크지 못하는 것엔, 어린 시절부터 겪은 연기로 인한 내상이 그 원인이 아닐까란 진단도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여배우의 경우도, 연기로 인한 내적 손상이 해소되지 못하고 쌓이면서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지 않았을까?라고 조심스럽게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배우는 “심리적인 제약요소(컴플렉스)를 어떻게든 털어내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가져가는가?”가 중요한 화두라고 했다. 우리나라 남자배우들은 어린시절부터 ‘남자는 울면 안돼’라는 말을 들어서, 성인이 되어서 잘 울지 못하게 되었다. 그건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여자는 초등학교를 갈 때가 되면, ‘앉을 땐 다리를 오므려라’ ‘여성은 깨끗하고 정숙하고 아름다워야 한다’라는 가치를 주입받고 거기에 맞춰서 살아가야 하는 억압된 생활을 하게 된다. 우리는 모범시민으로 성장하면 자신의 자연스러운 본성과는 점점 멀어지며 ‘심리적으로 병든 상태’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현대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우린 국사시간에 현대사 이전은 400페이지를 배우지만, 막상 중요한 현대사는 10페이지로 간단하게 배우고 만다. 왜일까?

 

문성근 씨는 여기서 하나의 음모론을 들고 나온다. “현대사에 대해 많이 알게 되면, 권위적인 정부에 저항할까봐 가르치지 않는다는 견해가 있다”고.

 

일견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우리 현대사는 1945년 8.15 독립 이후 1950년 6.25 전쟁을 비롯해 5.16, 12.12사태 등을 거치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진 ‘정통성’시비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구조였다. 그러나 문성근 씨의 지적대로 오늘날 대한국민과 한국인을 규정하는 최근 100년사에 대해 무지하다고 생각하니 몹시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비록 정사로 인정받는 것은 거의 없지만, 좀 더 책을 찾아보고 오늘날의 ‘나’를 규정하기 위한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성근 씨의 강연회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질의응답시간에서 내 마음을 울린 것은 그의 한 대답 때문이었다. 문성근 씨는 현재 본업인 연기자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백만송이 국민의 명령’이란 정치연대 커뮤니티를 운영중이다. 그에 대해 한 참석자가 온건하게 돌려서 물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본업마저 접은 채, 그런 일에 몰두하고 있느냐?’고.

 

그러자 그가 답했다. “저는 우리 사회에서 받은 것이 많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도 대박났고, <그것이 알고 싶다>도 대박났습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는 진실로 빛나 보였다! 본인은 받은 것이 많다고 했지만, 같은 시간에 누군가는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힘없는 이들의 손목까지 꺾으며, 주머니속 고린 동전 한잎마저 빼았고 있다. 그는 배우로서 과분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피나는 노력의 당연한 결과였고, 만약 그렇게 주장해도 비난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탓일까? 그는 자신이 걷고 있는 힘들고 혹독한 길을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날 대다수의 지식인들이 숨 죽인 채 옳다고 여겨지는 주장도, 자신에게 ‘약간의 불이익’이라도 돌아올까봐 조심하는 상황에서 너무나 위대해보였다.

 

개인적으로 그의 의견이나 주장에 100% 동조하거나 찬성하는 쪽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에 대해서 기꺼이 현재 상황에서 희생이나 불이익을 감수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매진하는 그의 모습에서 느껴진 진심은, 그 어떤 연설보다 나를 더욱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의미없는 앎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그에게 나는 박수와 찬사를 아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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