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에서 박하선은 잠깐 장님이 되고 말았다. 렌즈 때문에 눈이 안 좋아져서 안경을 꼈더가 주위의 웃음을 샀고, 그 일로 그녀가 그동안 미루어왔던 라섹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녀는 수술을 대기하면서 사촌인 김지원이 그동안 르완다로 갈 생각이었음 알게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이후 박하선은 김지원이 르완다로 가지 못하게 계속해서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러나 시트콤 속 그녀는 김지원이 없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하고, 심지어 같이 이야기할 때조차 다른 방향을 보고 이야기한다. 안 보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보는 내내 불편한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박하선은 정말 착한 여성이다. 그동안 <하이킥 3>에서 비춰진 그녀는 자신을 속여서 사귄 고영욱에 대해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남의 집에 묶여진 강아지가 안쓰러운 나머지 개사료를 사서 가져다 줄 정도이다. 그뿐인가? 생판 남인 백진희를 자신의 방에서 함께 지내면서 친자매처럼 지낼 정도로 보기 드물게 착한 여성이다.
그러나 그녀는 선생이란 직업탓 인지 아니면, 김지원이 부모님도 없이 혼자 사는 탓인지 몰라도 너무나 심하게 간섭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해는 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마저 뉴질랜드에서 잃고 혼자 된 그녀가 얼마나 안쓰러웠겠는가? 게다가 함께 살면서 많이 정이 들었고, ‘이모부 대신’이란 마음으로 엄청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라섹 수술 때문에 장님이 되었다는 설정은 그녀가 얼마나 김지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지 알려주는 장치라고 여겨진다. 김지원은 그동안의 학교 생활이 별로 즐겁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고 외로웠다’고 고백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반친구마저 결국은 경쟁자로 내모는 우리 사회 때문일 것이다. 1화에서 묘사되었지만 반의 짖궂은 남학생들은 김지원의 치마속을 엿보려 하는 도를 지나친 행동을 보여줬다. 물론 김지원은 멋진 하이킥을 선사하며 속시원하게 응징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체계는 4~5세만 되어도 영재교육이니 선행학습이니 뭐니해서 아이들을 놀지 못하게 하고, 끝없이 경쟁으로 밀어넣고 있다. 물론 이해는 간다. 오늘날처럼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되기 힘든 사회에, 경쟁에서 내 아이만큼은 살아남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교육을 시키고 싶어한다. 남들보다 앞서기 위해서.
그러나 그런 경쟁은 끝이 없다. 초등학교-중학교-대학교. 심지어 직장에 가서도 경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 와중에 승자는 없고 대다수는 패자로서 쓸쓸이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한다.
다행히 김지원은 똑똑한 편이라서 얼마전에 전교 1등을 할 정도였다. 그녀가 원한다면 국내에서 제일 좋은 명문대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을 사랑하고, 윤계상이 르완다에 가고자 하는 목적에 깊이 감동한 그녀로서는, 의미없는 공부에 대해 자신의 여태까지의 삶에 대해 상당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물론 박하선의 입장도 이해한다. 필자라도 그런 입장이라면 일단 ‘반대’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반대만을 외치기 전에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김지원의 인생은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김지원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박하선은 라섹 수술로 인해 잠시 장님상태가 되어 길거리를 지나가는 노인의 이마를 치고, 경찰차를 택시로 오인하고 타고, 식탁에서 반찬대신 쌈장을 먹는 실수를 한다.
장님은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가 없다. 특히 박하선처럼 정상적인 사람이 갑자기 장님이 되면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다. 그녀는 김지원의 도움을 받아 움직이는 상황에서, 즉 자기 자신도 책임지지 못하면서 김지원의 인생에 참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녀로선 진심일 것이다. 돌아가신 이모부를 대신해서 김지원이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 무엇일까? 장님이란 설정이 그렇지만 박하선 역시 얼마나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가? 사기꾼한테 속아서 줄리엔의 전세금 1천만원을 날렸고, 마음에도 없는 고영욱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여 한동안 고문에 가까운 데이트를 해야만 한다.
지금에야 운좋게 윤지석과 사귀고 있지만, 사실 그녀의 인생 역시 제대로 살아왔다고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하선은 ‘내가 사춘기를 지내봐서 아는데...’라는 익숙한 화법을 제시한다.
그런 화법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사실은 전혀 다른 이의 진심이나 이야기를 알려고 하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박하선 역시 10대였을 때가 있고, 나름대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박하선만의 체험일 뿐이다.
김지원이 사는 21세기는 그때와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고, 사회적 가치관이나 황금률 역시 변했다. 따라서 박하선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절대로 김지원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일례로 <하이킥 3>에서 가장 이해심이 많은 윤계상은 김지원에게 ‘아직 세상은 해볼 일이 많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해, 하루 종일 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 걸그룹에 대해 공부하고, 함께 공개방송 녹화에 가고, 네일샵도 가고, 즐거운 시간을 나누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런 노력조차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윤계상은 김지원의 고민과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이킥 3>에서 그나마 가장 다른 이의 마음을 배려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윤계상마저 실패했는데, 박하선은 무조건 ‘자신만의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고 있다.
그런 박하선의 모습은 장님인 상황에서도 자신의 말만 옳으니 들으라고 떼쓰는 ‘어른들’을 떠올리게 한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 제목이 의미하듯이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의 패턴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10대와 20대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해도 좋을 만큼 생각의 골이 넓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윤계상이 말한 것처럼 ‘그저 즐겁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르완다행을 고민하는 김지원의 이야기에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 박하선의 모습은 정말 ‘눈뜬 장님’ 그 자체였다.
더욱 슬픈 것은 박하선의 직업은 교사이며, 아직 40-50대도 아닌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김지원의 고민과 결심에 대해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소통부재와 상명하복식의 문화가 판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이 이상가는 풍자의 설정은 없다고 여겨진다. 희극으로 웃고 넘기기엔 바로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황이라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입맛이 매우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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